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건빵 Mar 18. 2017

단재학교, 그 시작을 기록하다

석촌동 단재학교 시대의 개막 1 

단재학교는 2009년 9월에 서초구 반포동의 한 사무실을 임대하면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처음으로 시작하는 학교는 학교 구성원이 제대로 갖춰질리 만무하다. 두 명의 교사들이 힘을 모아 문은 열었지만, 학생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개교를 하기 전에 학교 설명회도 하고 제주도로 몇 일간 여행을 떠나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는 뜻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시작은 매우 미약했다.                



▲ 반포동 단재학교는 잘 알지 못한다. 성내동으로 이전한 후에 내가 근무하게 됐으니 말이다.




막연하지만 그래도 시작하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단재학교가 제대로 발판을 다지게 된 강동구 둔촌동으로 이전한다. 반포동 학교는 여러 아이들이 함께 하기엔 비좁았기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곳은 거금을 들여 한 층의 반절을 임대하여 학교 분위기에 맞게 리모델링을 하였다. 

태생적으로 빌딩 내에 입주해 있어 학원 같은 분위기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반포동의 학교에 비하면 천지 차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물론 내가 단재학교에 근무하게 된 때는 그 후로 2년이 지난 2011년이니 반포동 학교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처음 시작할 당시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으며 유추해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둔촌동 학교에서 2년을 보내며 단재학교는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교사도 어느덧 5명으로 늘어 초기의 썰렁한 기운은 사라졌으며, 학생도 18명까지 불어나 여러 사람이 북적대는 공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시기에 내가 단재학교에 취직하게 됐다. 

나와 같이 겁이 많은 사람은 ‘너무나 막연해. 그리고 막상 시작한다 해도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으니, 시작하지 않을래’라고 합리화하며 안 할 명분을 찾는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늘 해야 할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맞서야 하는 이유보다 멈춰야 하는 이유가 많다. 누가 보면 ‘신중하다’, ‘사려 깊다’고 평할지도 모르지만, 실상 그것보다 ‘막연히 두려워한다’, ‘책임지기 싫어한다’고 평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에 반해 단재학교의 문을 열고 2년 동안의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이렇게 이끌어온 두 명의 교사들은 나와는 달리 ‘용기가 있다’,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줄 안다’고 평가할 만하다.                


▲ 3층을 두 군데가 나눠서 썼다. 이 당시 단재학교는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다.




시작해보라그리고 어떻게 되는지는 지켜보라

     

『중용』이란 책엔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우려 맘먹었다면 제대로 배우지 않고서 그만두지 않으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으려 했다면 제대로 아지 않고서 그만두지 않고, 생각하지 않을지언정 생각하려 맘먹었다면 (생각한 바를) 얻기 전에 그만두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분별하려 했다면 분명히 분별하기 전에 그만두지 않고, 행동하지 않을지언정 행동하려 했다면 독실히 행하지 못하기 전엔 그만두지 않는다. 남이 한 번에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나는 백 번씩 해서라도 그것을 하며, 남이 그 일을 열 번에 할 수 있다면 나는 천 번씩 해서라도 그 일을 한다. 참으로 이런 방식으로 해나갈 수 있다면, 비록 어리석더라도 현명해질 것이며 비록 연약하더라도 강해질 것이다. (有弗學 學之 弗能 弗措也 有弗問 問之 弗知 弗措也 有弗思 思之 弗得 弗措也 有弗辨 辨之 弗明 弗措也 有弗行 行之 弗篤 弗措也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果能此道矣 雖愚 必明 雖柔 必强 - 20장)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뛴다. 그건 내가 그만큼 우유부단하기 때문이고, ’해보려 맘먹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다‘는 그 정신을 본받고 싶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구절에 가장 적합한 예는 단재학교가 문을 열고 2년 동안 달려온 그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쯤에서 할 수 있는 말은 ‘훗날에 어떻게 될지 두려워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있음에도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히 해보라’라는 주문이다. 그게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진다면 두 말할 나위 없겠지만, 설혹 실패로 끝날지라도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 ‘실패는 단순히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그런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우린 성공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그건 도전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고, 그건 다른 어떤 경험으로든 대신할 수 없다.                



▲ 영화팀과 연극팀도 자리를 잡아 각 팀에 맞게 발표회를 갖게 됐다.




둔촌동 단재학교에서 건빵이 되려 발버둥 치다

     

단재학교에 처음 갔을 때의 인상은 ‘학원 같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사무실을 리모델링하여 쓰다 보니,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흥미로웠던 점은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이들의 표정은 한 없이 밝고, 자유분방했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학원은 성적 부담이란 일반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간이기에, 아이들은 주눅 들어 있고 그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기계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 부랴부랴 시간에 쫓겨 또 다른 학원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표정은 어둡고 말도 거의 하지 않으며 여유롭게 무언가를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이곳의 환경은 얼핏 학원 같지만, 분위기는 맘껏 자신을 표현해도 되고 그런 것들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해방구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변산공동체학교’에 대해 쓴 윤구병쌤의 책을 읽으며 내가 지금껏 다녔던 학교와는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심취했었고, 정령 교사가 된다면 그런 학급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가 단재학교에선 이미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뿌듯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자유분방함을 받아들이기엔 내 자신이 한계로 작용했다. 그러고 보면 일반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군대를 제대했으니, 몸엔 이미 낙인처럼 규율과 순응, 단체와 획일화가 알알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내 뜻대로 하려고 했고, 자율을 중시한다고 하면서도 규칙을 강조하려고만 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그런 것들이 지긋지긋하단 생각을 했고 그 때의 교사들을 꽉꽉 막혀 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과 닮아간다’는 말처럼 나 또한 그 당시의 학교 교사들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어느 정도까지 자율로 할 것인가? 어느 정도까지 규칙을 적용할 것인가?’하는 부분이었다. 그건 이상과 현실에 대한 고민만큼이나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교사상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찌 보면 둔촌동 단재학교엔 초임 교사 건빵이 어떻게 이상과 현실을 매치시키려 노력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얼마나 교육에 대한 생각에 균열이 가며 혼란스러워 했는지 그 모든 게 담겨 있다.         



▲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을 만들고 있는 아이들. 이 사진에 나온 아이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처음의 의미가 담겨 있던 둔촌동 단재학교

     

강동구 둔촌동에서 송파구 송파동으로 2014년 8월 13일(수)에 이전했으니, 나는 둔촌동 학교에서 2년 10개월가량을 보낸 셈이다. 그 기간 동안 영화팀과 연극팀이 단재학교의 프로젝트팀으로 자리를 잡았고, 아이들도 그 두 팀 중 하나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게 됐다. 나도 나름 영화팀 교사라는 역할을 맡아 ‘자율과 규율 사이에서’, ‘전공인 한문과 문외한인 영화 사이에서’ 나름의 갈등과 고민을 하며 아이들과 부대끼며 서서히 자리를 잡아갔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란 게 있다. 그건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사라지고 마는 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얼른 이 시간이 흘러서 많은 경험을 쌓아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처음’은 어설프지만 열정적이며,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깜량도 알지 못하고 대들 수 있을 때다. 그만큼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참신하게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펼쳐나갈 수 있을 때다. 그런 시기는 어떻게든 흘러가고 변해가게 되어 있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관계와 마주치며 닳고 닳아 능숙해지기도 하고 타성에 젖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처음’의 의미를 곱씹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며, 처음 순간의 풋풋함과 열정은 다시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영화팀 아이들과의 첫 여행. 고향인 전주로 가서 영화제에 참석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둔촌동 단재학교는 모든 일의 시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자, 지금에 이르러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가 있는 장소를 떠나 송파동으로 학교를 이전한다고 하니 은근히 섭섭하고 아쉽더라. 

그러나 어찌 보면 단재학교를 송파동으로 이전하는 것은 단재학교의 일대 변혁이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학원과 같은 구조에서 벗어나 개인주택을 임대하며 좀 더 대안학교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학생 중심의 학교에서 지역과 함께 하는 학교의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송파동 학교로 이전하는 소감은 이전에 ‘단재학교 성내동 시대를 끝내고 송파동 시대를 열다’라는 글에 밝혔으니, 여기선 다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다음 후기에선 송파동 시대를 연 단재학교에 대한 이야기와 2년 반 만에 석촌동으로 이전하게 된 이야기를 쓰도록 하겠다. 



▲ 2년 반동안 우리의 배움터가 되어준 곳, 송파동 단재학교.




목차     


1. 단재학교그 시작을 기록하다

막연하지만 그래도 시작하다

시작해보라, 그리고 어떻게 되는지는 지켜보라

둔촌동 단재학교에서 건빵이 되려 발버둥 치다

처음의 의미가 담겨 있던 둔촌동 단재학교     


2. 단재학교석촌동에서 새 역사를 쓰다

송파동 단재학교는 더 큰 날갯짓을 할 수 있던 곳

건빵, 송파동 학교에서 좀 더 다져지다

석촌동 단재학교에선 어떤 일들이 생길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