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우 Sep 22. 2023

글씨 쓰는 여자

캘리에 빠지는 시간

일주일에 한 번 캘리그래피 수업이 있다.

벌써 2년을 향해 가고 있는데 코로나에 방학에 결석도 많았고 실력은 영 늘지 않아 누가 엽서라도 달랠까 봐 조용히 다니고 있다. 붓펜으로 시작해서 붓글씨의 매력에 빠져 먹향에 취하는 수요일이 기다려진다.


시작하게 된 계기는 남편의 권유였다.

첫 아이 임신 때도 퀼트 수업을 들으며 즐거운 태교를 했다. 아기자기한 장식물로 집을 장식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데 잡념 없이 빠져들어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에는 매력을 느낀다. 부산을 떨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조용히 몰입하는 순간은 내 안을 비운 자리를 나로 채우는 만족감을 준다. 잘 맞을 거라 생각해서 권한 줄 알았는데 하루는 집에서 선생님이 내 준 과제를 연습하고 있으려니


거봐, 하길 잘했지?
쓰면서 화를 좀 가라앉히고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


라며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알고 보니 성질을 죽이라는 의도였나본데 글씨를 쓰는 동안만큼은 평화로우니 일부는 성공한 게 아닐까.




오전 10시, 아담하고 해가 잘 드는 공방에 들어서면 다른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초록색 깔개를 꺼내어 편다. 화선지 한 장을 문진으로 판판하게 고정한 뒤 나뭇잎 모양 접시에 먹물을 따른다. 붓을 먹물에 흠뻑 적시며 준비를 시키는 동안 나도 호흡을 고르며 분주한 생각들을 접어 둔다. 먹물을 머금은 붓을 접시 가장자리에 달래듯 여러 번 덜어내고 화선지를 마주하면 하얀 종이와 나 사이에는 특별한 공간이 만들어진다.

오로지 흑과 백의 세상. 글씨와 나만이 머무는 곳.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밀도 높고 단순한 시간.


매번 선생님의 지도를 명심하며 종이 여백이며 자간의 간격과 배치를 신중하게 고민해 써 내려가지만 넓은 종이에 연습한 같은 문구의 글씨들을 보면 제각기 다른 모양이다. 집중도나 신경 썼던 부분에 따라 굵기와 강약의 변화가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글씨체도 다양하고 좋은 글귀도 많은데 아직 창작은 너무나 큰 산이고 선생님이 쓰신 공방에 있는 견본들을 따라 쓰는 것만으로도 벅찬 실력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읽고 마음에 담은 글이 적당히 힘을 뺀 손을 통해 종이에 자리 잡을 때면 일주일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정보를 찾고 머리에 담고 여러 감정들에 허우적대며 스스로가 소비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으로써 소위 털리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비우고 또 비우는 시간들이 필요하고 반가운 이유이다. 멋지게 잘 쓰고 싶지만 이조차 욕심이기에 내려놓고 열심히 쓰다 보면 나만의 글씨를 찾고 다른 요일에도 마음의 평화가 먹물처럼 번져 나가리라 믿는다.  


이전 03화 작아지는 마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