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변증법은 현실을 완전히 구성하려는 시도이지만 단절(unterbrochen) 없이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내재하는 단절들을 통해 단절들 속에서 구성해 낸다고 말할 수 있다.
‘단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필연을 얘기하면서 단절을 어떻게 얘기하는가? 변증법적 전개 과정은 필연을 전제한다. 내재 비판할 때도 자의적으로 외부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 자체에서 불가피하게 해 나아가는 것이다.
전개되고 대응한다고 보는 것인데 아도르노는 왜 단절이라는 말을 쓰는가.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생각하는데 하나는 양질 전환 문제다. 양적인 변화에서 질적으로 도약할 때 비약적으로 변한다. 그냥 그냥 연속선상에서 변하는 건 아니다.
또 하나는 아도르노가 이런 표현을 한다. 사유를 그냥 하나하나 따라가면서 계속 한 발 한발 나아가서는 동어 반복에 머물기 쉽다. 그래서 사유는 한 발 한 발 나갈 줄도 알아야 하지만 비약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면서 ‘날아간다’는 표현을 쓴다.
날아다니기만 해서는 안 되지만 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아도르노가 표현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1 2 3 4 5 6 7 8이 연속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 구멍투성이다. 무한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 전개라는 것들은 어떻게 보면 굉장히 치밀하게 필연적인 듯한 외관을 띄어도 사실은 다 구멍투성이 아닌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걸 다 채우려고 들면 무한 소급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엉터리 같은 사유 중 첫 번째가 표상적 사유다. 그냥 막 생각나는 대로 따라다니는 것이다. 두 번째가 논증적 사고다. 무한 소급하는 사고다. 한마디 할 때마다 그걸 증명하려고 끝없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 증명하면 그건 또 왜 그러는지 또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무한 소급해야 하는 사고다. 그러면 세계사를 맨날 들고 다녀야 하는데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비약의 어떤 조건이란 것이 있을까. 필연적인 조건은 아니더라도 그런 게 있는가.
헤겔에게는 개념적 사유가 그 조건이다. 개념적 사유에서 개념은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 자체의 살아있는 본질이다. 즉, 사태 자체로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사태 자체라는 게 현실에 모순이 있듯이 필연적으로 따라가지만 현실 자체도 뭔가 설명할 수는 없는데 비약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변화가 오는 가장 근원적인 사태로 갈 때 뭔가 도약적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보통 철학 책 서문에서 자기가 무슨 목적으로 책을 쓴다, 이제까지 이런 연구들을 이렇게 해왔다고 쓴다. 옛날에 누구는 이렇게 했고 누구는 이렇게 했고 하는 걸 비교하는 것은 사태 자체 아닌 걸 얘기하는 것뿐이다.
사태 자체로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어떠냐를 얘기해라. 남 얘기하지 말고 자기 얘기해라. 글쓰기 할 때도 빙빙 돌리지 말고, 변죽만 울리지 말고 본질로 들어가라. 이런 요구들이 떠오른다.
양에서 질로 변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사회가 일정하게 기술을 발전시키면 그 기술력들이 어느 단계에 가면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오히려 도움이 안 되는 단계까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복제 기술이 그렇다. 지금 USB 하나만 꽂으면 어마어마한 파일이 다 복사가 된다. 근데 원래 만들 때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고 해서 하나에 얼마씩 계산해서 돈 받고 팔고 싶은데 사람들이 안 사고 복사해 버린다. 그러면 시장 논리에 안 맞다.
리눅스처럼 그냥 공유하자. 이렇게 돼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시장 원리에 따라서 얼마씩 다 받아야 돼. 그러면 온갖 다른 방식을 통해서, 법률을 통하든지 국가 권력이 개입해서 시장 논리, 자본주의 논리가 아닌 것으로 커버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술들은 이미 자본주의를 살살 넘어가기 시작하는 그런 단계에 가 있는 기술인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을 양적인 변화라고 본다면 어느 단계에 가면 그게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져서 자본주의를 위한 기술들이었는데 이미 자본주의를 위한 기술로 기능을 안 하기 시작한다. 변질한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회주의로 가거나 공동체로 가거나 하는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변화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날 때 그게 그다음 단계로 일직선으로 가는 게 아니라 뭔가 확 변해가지고 그 변하는 단계를 어떻게 설명할지 잘 모를 때도 있다.
‘양질 전환’을 문제 삼는 지점이 그런 것이다. 양이 극대화되면 자연스럽게 질적으로 변하냐, 그래야 한다. 양질 전환이라는 것이 설명될 수 있는데 그게 설명이 안 되면 문제 제기할 수밖에 없다. 질로 변하는 어떤 조건을 따지는 것이다,
맑스는 ‘자본’ 설명하면서 이렇게 축적이 돼서 이 정도 되는 게 기본이라고 얘기했다. 그건 돼야만 자본으로 변한다. 이런 얘기를 했지만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조건도 있다. 투하되어야 한다는 조건,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 조건을 얘기하면서 양질 전환은 자동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부정의 부정도 마찬가지다. 부정의 부정도 변증법에서 아주 핵심 법칙인데 앵겔스는 명확하게 얘기한다. 부정의 부정이 아무 때나 된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보리를 땅에 심으면 그 자체는 부정된다. 하지만 보리를 빻아 가지고 먹어버리면 양질 전환, 아니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떤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부정의 부정도 그런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적인 여러 현상들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양질 전환이라는 말로 압축해서 표현했을 뿐이라고 엥겔스는 얘기한다. 맑스는 자기가 연구해 본 결과 헤겔의 표현이 적절하다고 봐서 그걸 인정한 것뿐이다. 그런 얘기지 그 법칙에 근거해서 모든 게 자동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아니다.
양질 전환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운동 과정에서 소수가 이 사회를 바꾸려면 바꾸겠다는 의지를 가진 소수가 다수로 변하지 않고는, 양적으로 변하지 않고는, 양적으로 다수가 되지 않고는 질적 전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리 소수가 열심히 연구하고 조직하고 투쟁해 봐야 그게 다수로 전환되지 않고는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운동으로 변하지 않고는 질적 전환도 안 되는 것이다. 대세를 만들려고 하는 운동은 소수에 머물 수 없고 양적으로도 팽창해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야 뭔가 질적인 전환이 일어난다. 사회적으로 헤게모니를 얻어야 사회가 변하는 것이다.
헤겔의 [정신 현상학]에는 이런 표현이 나오는 대목이 있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있다가 태어날 때 그때까지는 양적인 변화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태어나는 것은 질적인 변환이다. 울음을 터뜨리고 바깥에 공기를 쐬는 변화가 있다.
이 철학도 그렇게 변화해 오는 과정이 있다. 이런 누적된 게 있어야만 그다음에 그런 질적 변화가 생긴다.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이 도약이 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냥 저절로 된다고 하면 어떤 운동을 할 필요가 없다. 저절로 될 거니까.
여기서 ‘단절’이라는 표현은 ‘양질 전환’ 개념하고 또 하나는 사유 자체가 그냥 직선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도르노는 데카르트식의 직선적인 사유 과정을 비판한다. 데카르트는 차곡차곡 간다는 얘기를 했는데, 아도르노는 한발 한 발이라는 개념을 ‘계단의 우상’이라고 표현한다. 계단의 우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날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의미를 보충하는 것이다.
2023. 12. 28.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