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읽기
변증법적 과정은 양쪽과 관계하는 어떤 것입니다. 즉 전체의 힘에 근거해 우리가 넘어야 하는 부분들 혹은 개별 계기들과 관계하는 것이며, 또한 전체와 관계하는 것이기도 한데, 우리가 언제나 이미 가지고 있고 마침내 진리가 되어야 할 개념 내지 전체는 부단히 개별에 대한 경험에 따라서 변경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번역본 53쪽~54쪽)
전체와 부분 양자를 다 갖춰야 한다. 그럼 어떡하면 되냐 할 때 아도르노는 지침이 있는 건 아니다. 보장되는 건 없다. 보장되는 건 없고 일종의 부도 수표 같거나 불량 수표다. 그렇지만 요구하는 것은 까다롭고 많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독단에 빠지거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거나 하는 데에서 벗어날 그나마 유일한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는 하나의 모델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사고하라고 하는 것이고, 이게 맞는 인식이라면 기존의 인식에다가 빛을 쪼여서 새로운 빛이 나게 한다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논리로 보면 ‘전형’이라는 리얼리즘의 핵심 개념이 그런 걸 추구했다. 사유 개별 경험이 개별 존재 사건을 통해서 보편적인 문제들로 나아가려는 그런 것이었는데 아도르노는 전형을 심하게 거부한다.
전형이 따로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어떤 개별자도 깊이 들어가면 그 안에 이미 현대사회가 너무 촘촘하게 얽혀 있어서 이 사회 전체가 드러난다. 이런 논리였다. 그래서 루카치를 비판하면서 리얼리즘을 거부하는 것이다.
아도르노 논리는 어떤 개별자도 진정성 가지고 깊이 들어갈 때는 전체 사회가 드러나는 본질적인 문제가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문학을 통해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안 한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보고 사물화된 의식을 조금 변화시키는 정도의 효과가 있다고 본다.
나아가 문학과 예술은 그 자체가 ‘반응 방식’이라고 본다. 현실의 억압 구조 이데올로기 틀에 대한 일종의 반응 방식이고 진정성 있는 예술들은 그런 걸 한다고 본다. 반응하고 그러면서 약간의 충격을 가할 수도 있고 사물화를 깨는 데 도움이 조금은 되는데 미시적이라고 본다.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역할이 있다고 본다. 현실의 근본 문제들을 들춰냄으로써 그걸 변화시킬 수 있는 의지나 인식을 전파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루카치는 전략적으로 사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전형이라는 것은 적절한 사례들도 찾아야 하고 근본 문제를 다 보여주더라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떤 문제들을 더 보여주고 그 색깔이 다 다를 수 있다고 봐서 전형을 강조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방식은 자연과학들에서 고전적인 모델에서 우리가 대면하게 되고 실제로 다루어지는 전통과학에서 되풀이하여 접하게 되는 단계적 사유(Schritt-für-Schritt- Denken)가 아닙니다.(번역본 177쪽)
이 대목에서 아도르노가 굉장히 치밀한 사고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을 놓고는 왜 이렇게 표피적으로 비난하는지 모르겠다. 리얼리즘을 자연주의 수준으로 자꾸 깎아내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리얼리즘 개념을 버리지는 못한다.
카프카, 베케트야말로 진짜 리얼리스트라고 얘기한다. 그 말은 리얼리즘이 좋다는 얘기다. 근데 루카치가 평가하는 리얼리즘에 대해서는 제대로 공부도 안 한 것 같고 읽었을 텐데 평가를 안 해준다. 루카치는 절대 사진적인 자연주의적인 리얼리스트를 평가하지 않는다.
그게 아도르노의 세계관에서 나온다. 위계질서를 부정한다. 짜임 관계로 간다. 그러니까 다 중심에서 같은 거리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래서 어느 것이 전형이어야 될 필요가 없다. 다 어디서나 전형이 되는 것이다. 따로 전형이 없는 것이다.
이게 무슨 얘기냐. 아도르노 말고 다른 쪽에서 얘기하는 전형, 리얼리즘 개념은 굉장히 전략적인 사고. 인간이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도 뭔가 집중해서 핵심적인 문제들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보여주는 갈등하는 인간들을 보여주고 그려내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삶을 통해서 그 사회의 핵심 문제들 갈등들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전략적인 거다. 작품을 통해서 이미 사회의 근본 문제들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줘. 이거였는데 똑같이 근본 문제로 들어가는데 아도르노는 아무 데서나 들어가도 된다고 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전형적인 것들이 있다고 보는데 작가의 능력이다.
아도르노가 변혁에 대한 부분에서 소극적이고 어떻게 보면 체념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항상 이 경험 세계의 전체는 끝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아도르노가 총체적 지배를 얘기하지만 <변증법 입문>에서는 또 끊임없이 모순을 중심에 놓고 있다.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총체적으로 지배 관리되는 사회라는 모델은 한국 사회는 적용이 안 된다. 안 맞다. 한국의 역동성이 있고 모순이 너무 눈에 보인다.
2024. 4. 4.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