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읽기
헤겔의 경우 ‘매개’라는 표현은 언제나 우리가 한 개념 자체를 알게 되는 순간 그 개념에 요구될 수밖에 없는 변경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매개란 그 어떤 존재 속에나 필연적으로 정립되어 있는 형성의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번역본 44-45쪽)
매개가 개념적인 것이냐, 아니면 존재 차원의 문제냐. 헤겔 경우는 양자가 구분이 잘 안 된다. 같이 가는 것이다. 변증법 논리에서는 일반적으로 그 둘이 그냥 항상 쌍을 이루면서 같이 가는 것 같다. 존재 차원에서의 매개, 그다음에 개념 차원에서의 매개, 이것을 별도로 따로 생각하지 않는다.
변증법이 보편적 매개의 철학이라면, (번역본 45쪽)
이것도 독특한 표현이다. 아도르노는 변증법을 ‘보편적 매개의 철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여러분이 어떤 존재를 그런 것으로 규정하고자 시도함으로써 동시에 바로 그것이 일종의 형성으로 되지 않는 존재란 실제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번역본 45쪽)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형성이다. 형성 과정에 있는 것들이다. 매개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매개라는 말을 되게 싫어하는 부류도 있다.
알튀세르는 매개니, 지양이니 이런 말을 싹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나 모르겠다. 그 당시에 지적 파워가 막강하게 막 분출되던 시기에 자기 제자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운동에도 일정하게 기여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었다. 68 혁명 이후에 그런 분위기에서 자기들이 필요한 만큼 변형하고 수정하면 될 텐데 쓸어버린다. 청산주의다.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맑스가 언제 그러는가.
“형성이라는 게 됨(werden)”이다. 어떻게 된다는 것이다. “되어가는” ‘되기’ 들뢰즈도 좋아한다.
매개는 “마치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절대적인 것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 절대적 인식을 포기하기라도 하는 듯이, 기피 대상이기도 하다.”(번역본 45쪽)
매개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인 것 속에는 매개가 없다. 그 이상의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마치 절대적인 인식을 포기하기라도 하는 듯이 기피한다.
그것은 개념들을 불변적인 것으로 고수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변경함으로써 -달리 말해 그것들의 존재가 생성이며, 진리 자체가 본래 역동적임으로써- 일종의 진리 개념의 해체와 같아지고, 특정한 것 또는 규정된 것을 우리에게서 슬그머니 앗아가는 일종의 보편적 상대주의와 같아진다는 생각입니다.(번역본 45쪽)
보편적 상대주의가 변증법 아니냐. 고정된 개념을 다 무시하고 무엇을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냥 뺏어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끊임없이 생성을 얘기하고 이것은 보편적 상대주의 아니냐. 이렇게 의심을 한다는 것이다. 기피의 내용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서 변증법에 대한 반대 분위기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개념의 운동이 흔히 생각하듯이 개념들을 –자의적으로- 변경하기, 곡예하기(Die-Begriffe- Jonglieren)가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념의 운동이 본래 사태의 필연성 자체로부터 나오며, 그런 한에서 궤변적 방식과 정 반대라는 것을 뜻합니다. 궤변적 방식의 본질은 개념들의 내적 생명을, 즉 개념들이 이해되기 위해 자체로부터 요구하는 바를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에다 외부로부터 자의적으로 어느 정도 상이한 의미들을 갖다 붙이는 데 있습니다.(번역본 45쪽-46쪽)
말이 어렵지만 레닌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개념의 운동이라는 게 객관적일 때는 변증법적이다. 사태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면 변증법적이다. 주관적이라면 궤변이거나 관념론이거나 엉터리가 된다고 봤다.
그러니까, 주관적인 게 아니라, 주체가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태 자체로부터 불가피하다고 보이면 이건 변증법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이 몇 마디 하지는 않지만 <철학 노트>에서 변증법과 관련해서 여기저기서 얘기하는 내용들이 지금 아도르노가 레닌 일체 인용도 안 하고 레닌하고 각을 세우고 그러는데도 상당히 공통점이 있다.
지어낸 것인지 사태 자체에서 나온 것인지, 그건 또 현실과 대질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누군가가 그럴듯하게 지어내서 사태 자체에 근거했다고 하면, 자기 멋대로 지어낸 건 아니라고 주장하면 속아 넘어갈 수도 있다.
루카치와 블로흐(Ernst Bloch)가 표현주의 논쟁할 때, 블로흐가 현실 자체가 분열되어 있는데 그것을 총체성으로 묶어서 얘기하는 것은 관념론적인 유산 아니냐. 루카치에게 관념론자라고 한다.
루카치는 이렇게 반론한다. 현실이 분열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르주아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데서 나오는 직접적인 체험의 산물일 뿐이다. 엄연히 모든 경제 체제는 통일체다.
그 안에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대립하고 어쩌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통일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건 맑스주의의 기본이다. 그래서, 분열되어 있다고 체험하는 그대가 직접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대야말로 관념론에 빠져 있다. 그렇게 서로 관념론자가 된 것이다.
그럼 그걸 어떻게 검증하나. 참 어렵다. 합의 보면 끝나나. 그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검증에 올라가 앉아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시험대에 올라가 있다. 이 모든 반론을 다 평정하고 이제 제대로 된 사태로부터 나온 올바른 이론에 와 있어라고 떠드는 순간 바보가 된다. 끊임없이 검증을 다시 받아야 한다.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첫째 척도로 헤겔이 들고 나온 것이 ‘진리는 전체다’라고 얘기를 했는데 아도르노는 진리가 꼭 전체일 수는 없다. 그건 관념론적인 것이다. 유물론 입장에서는 열려 있다.
그럴 때 그래도 사태 자체를 놓고 진지하게 면밀하게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그 자체의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하고, 그 한계도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더 나아가야 하는 필연성이 나타난 것이다. 사태 자체로 강제성이 있다. 인식에서 구속성을 갖는 것이다. 여기까지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도르노는 그걸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별 인식 또는 사태 자체를 들여다봤을 때 그때그때 나타나는 인식이 벽에 부딪힌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걸 돌파해서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 건 필연이라고 봤다. 끊임없이 넓혀 나가는데 전체까지 가야만 진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2024. 1. 19.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