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읽기
1과 3 사이에 있는 숫자가 무엇인가? 1과 3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얼핏 생각하면 2이지만 무한이다. 1과 3 사이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자연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헤겔 시대는 정신이야말로 무한하고 물질들은 유한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했고, 무한과 유한을 어떻게 통일시킬 것이냐를 고민했다. 따져보면 정신이야말로 그 무한한 물질 가운데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굉장히 일시적으로 우주사적인 시간으로 보자면 잠깐 나타났지만 이게 또 사라진다는 전제 하에서도 그런 게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그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이건 아닌 것 같다.
엥겔스가 <반듀링론>에서 그 얘기를 한다. 인간의 종말로 이성적 존재가 끝난다고 생각할 것까지는 없다. 진화 과정이 또 어떻게 진행되어서 나중에 어떤 존재가 나타날지 누가 어떻게 알겠나. 미리 단정할 수 없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런 얘기도 해야 한다.
정신, 정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념론적이다. 현대 철학에서 유물론 기본 훈련만 돼도 인간이라는 존재가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은 기본으로 전제한다. 그런데 자본이 만들어내는 규격화된 감각들, 상품에 대한 욕구들이 있다.
정신이 여전히 그런 것들과 싸울 수 있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힘들을 유지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정신적인 부분도 많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특히, 과학이나 기술이 너무 발전하니까 로봇이 되어 가니까 아날로그부터 시작해서 어떤 정신적인 것들을 강조한다는 느낌도 있다.
칸트가 우리가 인식하는 것들은 전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현상으로서만 알 뿐이다. 이것이 물자체는 아니다. 한마디로 정리해 버린 것이다. 정신하고 육체가 똑같은 건 아니다. 어느 것에 좀 더 중심을 두느냐는 문제다. 양자가 완전히 분리될 수도 없고 하나일 수도 없는 것이다.
헤겔 같으면 존재와 늘 구분하지만 결국은 통일체로 갈 때까지 끌고 간다. 양자가 동일해지는 단계까지 가는 것이다. 헤겔의 경우에는 개념 자체가 내가 그냥 의식으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그 대상의 ‘진액’이라고 보는 것이다.
전체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은 허구겠지만 계속 알아가고, 아는 만큼의 상황에서 최소한의 옳고 그름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이 전체를 향해 간다는 프로젝트로 야심 차게 내놓았을 뿐이지, 어떠한 인식도 사실은 거기까지 도달하는 건 없다고 봐야 한다.
헤겔이 어마어마한 체계를 완성했지만 무시되는 것이다. 맑스 같은 경우도 누가 질문하면 모른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온갖 것에 대해서 한 마디씩 다 하는데 다 제한된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전체를 향해 가려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따라가려는 것이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엥겔스나 레닌은 이런 표현을 한다. 인류 전체의 무한한 발전을 통해서 그런 절대 진리로 갈 수 있다. 그렇지만 무한이라는 것은 시간이 있는 유한한 단계에서는 완성이 안 되는 그런 전체적인 지知인 것이다.
그들도 원론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전체 개념은 유기론적인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전체를 모르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럴 때 아도르노가 들고 나온 것이 과거의 다른 변증법에서 얘기되지 않은 아도르노만 독특하게 내놓는 것이 ‘미시론’이다.
미시론은 하나의 개별자를 파고들 때 개별자를 끝없이 보는데 몰두하면 그것이 어떻다, 한계를 드러낼 때 그걸 탈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그 전체 개념을 들고 와서 거기다가 뒤집어 씌우는 게 아니라 개별자에 몰두함으로써 오히려 그 개별자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점점 더 나아갈 필연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유효하냐, 얼마나 들여다봐야 하느냐, 어떻게 들여다봐야 그것을 탈피할 수 있느냐. 내재 분석, 내재 비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체를, 개별자를 무한정 들여다보면 그것을 넘어서는 뭔가가 보인다는 것이 미시론 개념이다.
얼핏 보면 미시론 개념은 포스트모던 류들의 사고하고 손발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아도르노는 전체를 배격하는 건 아니다. 그 때문에 계속 전체로까지 가려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이 전체도 처음부터 고정된 게 아니라 전체 자체도 처음에는 추상적이라고 한다.
개별자로부터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과 대질하면서 전체도 변형되어 간다. 전체도 변화한다고 보는 것, 그러니까 개별에서부터 시작하되 전체로 나아가고 전체를 가지고 또 개별을 보되 그 전체도 변형되고 이런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으로 명쾌한 상들이 자꾸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헤겔적인 ‘진리는 전체다’라는 것을 아도르노 본인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건 유물론의 기본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에서는 우리의 한정된 인식을 가지고 무한한 자연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은 아무리 작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무한하다고 보고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전체가 주는 막연하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그런 방향 설정이라든지 모든 것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보고 그것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전체도 더 구체화되고 개별자도 그 한계를 탈피하게 되고, 그래서 점점 더 명쾌한 인식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것, 이것이 아도르노가 생각하는 미시론의 핵심인 것 같다. 자기는 변증법을 받아들이게 되는 중요한 동기가 이 미시론적인 사고였다고 주장한다.
2024. 1. 14.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