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읽기
진리를 영구 불변의 무엇이라고 보지 않고 ‘시간적 핵심’을 가지는 변화, 발전, 생성, 형성으로 보는 그런 사고방식이 있다. 진리를 이렇게 형성 과정 내지 그것들의 총체 이렇게 보는 것과 대립하는 사고방식 중 하나가 제일원리에 대한 것이다.
궁극적인 것을 찾으면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파생된다고, 해설, 해명, 해석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이다. 논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어쨌든 그런 것이 제일 철학 내지 제일원리를 강조하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핵심이다.
아도르노는 그런 관점에서는 예컨대 물질적 관계, 물질적 생활, 이것을 제일 원리로 설정하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동구권 철학들이 물적 관계들을 밝힘으로써 문제가 다 풀린 것처럼 얘기하는 성향이 있다고 보고 비판하는 것이다.
물적 관계를 제일원리처럼 상정한다는 것이 유물론의 기본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 구조는 물적 관계의 반영물이고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것이 유물론의 기본 테제 아닌가.
아도르노는 그것에 도전을 한 것이다. 그 부분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주체와 객체, 의식과 존재를 딱 나누는 것, 특히 레닌이 그렇게 표현을 많이 한다. 의식과 무관한 존재 또는 주체와 무관한 객체, 주관과 무관한 객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존재하는 객관적 현실의 법칙들, 이런 것을 강조했다.
루카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한다. 그렇게 주체와 객체를 딱 자르는 것이 바로 사물화 된 의식의 형태라고 본 것이다. 상호 관계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루카치는 20년대 후반에 레닌주의자가 되면서부터 레닌의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주체와 무관한 객관적 현실 경향, 발전 경향, 이런 것을 강조한다. 죽을 때까지 그런다. 후기 미학의 해석까지도 그런다. 그런 점에서 루카치는 레닌주의자로 인식론적으로 변했다. 전형적인 반영론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주체와 무관한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없다. 우리 의식의 대상이 물질이냐, 아니냐의 문제도 복잡하다. 나의 의식도 대상화하기 때문이다. 나의 의식을 물질로 볼 수도 있다. 나의 의식을 물질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물질이라는 하나의 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정신 또는 의식이라는 것을 따로 설정하는 한은 의식과 무관하게 물질만을 따로 분리해 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공허하다. 내 의식의 대상에는 물질적 요소와 더불어 의식적 요소까지 다 포함돼서 의식이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이 있고, 그다음에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할 때 그 사회적 존재의 진짜 핵심은 또 의식 아니냐는 것이다. 의식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과 존재를 딱 나눠가지고 존재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얘기만 하고 끝내버리면 너무 단조롭다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 안에 이미 의식이 포함되어 있다면 의식이 포함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다시 규정하는 복잡한 재귀 구조다. 자기가 자기를 규정하는 측면이 또 생기는 것이다.
시차는 있더라도 어쨌든 그런 복잡한 구조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변증법적인 사고다. 그것을 따라잡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객관화되어 있는 것 속에 의식의 산물들이 굉장히 많다. 의식의 산물이 아닌, 의식과 무관하게 사회적 존재로 존재하는 건 잘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작동하고 있는 의식의 대상인 사회적 존재 자체도 이미 의식과 무관하지 않고 또 나의 의식이라는 것도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건 당연한 것이다.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인데 상호작용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변증법은 사회적 조건을 밝히고 나면 끝나는 것일 수 없다. 물질적 조건을 따진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다. 상호작용들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가 이제 매개의 문제로 들어간다. 어떻게 결정되어 가느냐, 그 과정이 뭐냐 하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다.
매개의 문제가 있고, 제일원리를 거부한다는 변증법적인 논의가 여차하면 또 다른 형이상학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다. 그다음에 개념의 운동과 관련해서 변화 발전과 관련한 얘기지만 동일성 철학의 측면 얘기할 때 동일성 철학에서 핵심은 ‘진리는 전체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전체가 변화 발전해서 최종 단계까지 갔을 때 동일해지는 것이다. 개별자들은 다 모순에 빠진다. 전체가 되어야만 동일성 철학이 완성되는데 그 전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있다.
아도르노에게 몇 가지 포인트가 있다. 하나는, 전체라는 것이 분석도 안 되고 개념으로 파악되지도 않는 비합리적인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자연 전체도 아니다. 헤겔의 경우는 최대의 전체, 개념의 운동을 통해서 매개 과정 전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이 전체는 맑스가 얘기하는 구체적인 것과 거의 비슷하다. 맑스는 ‘구체’를 ‘제반 규정들의 총화’로 얘기한다. 반면에 추상은 그런 데서 뜯어낸 것이다. 뜯어낸 것이고 하나를 뽑아낸 것이고 압축해서 뽑아낸 것이다. 그것들의 총화가 구체적인 것이다.
과학은 추상에서 구체로 상승해 가야 된다고 보고 ‘추상에서 구체’로 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라고 맑스가 얘기할 때 그것은 헤겔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헤겔을 그 자리에서는 비판한다. 그렇게 나타난 구체라는 것은 사유의 산물인데 헤겔이 사유의 산물을 실제 현실의 구체와 혼동한다고 비판한다.
사유의 산물과 실제의 구체를 동일시한다. 이것은 관념론이라는 비판이다. 맑스는 그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알튀세르가 그걸 물고 늘어지면서 이론적 대상과 실제 대상을 구분해야 한다는 논리로 빠져든다.
‘이론적 실천’이라는 개념을 만든다. 알튀세르는 본인이 유물론을 고수하는 척하면서 자기가 또 관념론에 빠진다. 이론의 척도는 실천이 아니다까지 가고 그 척도는 이론 내에 있다고, 이론적 실천 내부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로 가면서 관념론이 된 것이다.
아무튼 이 전체는 첫째로 그냥 뭉뚱그려서 우리가 분석도 못하는 신비로운 그런 전체가 전혀 아니다. 유기론적인 또는 유기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그런 ‘매개 과정의 총화’로서의 전체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지적하는 부분이다. 관념론자들은 그렇게 의식과 존재가 일치하는 단계 전체로까지 의식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에서 ‘전체는 허위다’라고 얘기한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전체는 허위다’. 이런 자극적인 얘기들을 많이 했다. 시장의 언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이런 얘기도 했고 그러다가 나중에 그래도 서정시 또 써야 된다고 한다. 그런 말이 호소력을 가졌던 것 같다.
2024. 1. 11.
*위 글은 아도르노의 <변증법 입문> 번역자(홍승용)의 강의 노트를 바탕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테오도어 W. 아도르노, <변증법 입문>, 홍승용 역, 세창출판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