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 수도 있으니 조급해하지 마

나는 또다시 같은 조언을 들을 것이다

by 담쟁이

첫 직장에서 퇴사한 지 십여 년쯤 되었지만 아직도 가끔 만나는 동료들이 있다. 아니 사실 같이 일했던 대부분의 동료들과 각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연락을 주고받는다. '직장 동료들과는 SNS 친구를 맺지 않는다'라는 나름의 원칙을 정립하기 전에 만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들 중 대다수의 삶의 모습이 언제나 나에게 흥미와 도전을 주는 까닭이 더 크다.


흔히들 유연성 개방성 등을 비영리의 특징으로 생각하지만 거기에도 넓은 스펙트럼이 있다. 시민단체와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나의 첫 직장, 그중에서도 내가 속했던 부서는 여러 단체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지금 돌아봤을 때도 유독 구성원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강하고, 그것을 권위적으로 억압하지 않는 문화가 있었다. 각자 자기 목소리 내는 것을 꺼리지 않는 구성원들 덕분에 언제나 사무실은 싸움을 방불케 하는 논쟁과 끊임없는 토의가 이어졌지만 모두들 그러한 자기주장을 일할 때만 발휘하지 않아 준 덕분에 각자의 방식으로 일터를 즐겁게 하는데 일조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나는 첫 직장에서의 경험을 통해 일터에서도 즐거울 수 있고, 그건 성과를 내는 것과 대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당시 부서장님은 '너네 다른 회사에서 이렇게 하면 월급 주겠어?'라고 농담을 하시기도 했지만 다행히 지금껏 월급 밀리지 않는 회사에서 일할 수 있었고 대체로 나와 동료들의 일터를 즐겁게 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삶이 어딘가에서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나는 그때의 동료들 중 한두 명을 만나 영감을 충전한다. 막내 중에 막내였던 나도 두 번째 스무 살을 향해 빠르게 걸어가고 있지만 이제는 직함보다 언니오빠라는 호칭이 더 편해진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보면, 어린 내가 이렇게 평범한 직장생활을 해도 괜찮은지 위기감을 느낄 때도 있다. 몇 년 만에 모여서 밥 먹자는 약속을 하고 날짜를 기다리는 사이 나는 퇴사를 결정하고 꽤 많은 절차를 진행했다. 언제나처럼 나는 의논거리가 아니라 혼자 결정한 내 행보를 전했고, 역시나 그들은 내가 듣거나 말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 충분히 쉬고, 시간 가지고, 하고 싶은 거, 재미있는 걸 해.”
“쉬고 싶은 게 아니라니깐요. 더 열심히, 몰입해서 일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 그러니까 그런 걸 천천히 찾아보라고.”

열쭝은 지난 십 년간 네 군데의 직장에서 일했고, 그 사이에 이 년 반의 백수와 비슷한 생활이 있었지만 사실 그 시간은 큰 의미에서 자가고용 상태였다고 말한다. 얼마 전 들어간 직장의 워라밸에 대해 이야기하며 삼 년 버티는 게 목표라고 했지만 쉽지는 않아 보였다. 그 누구보다 사람을 가르치고 키워내는 데 재능과 열정 있어 보이던 펭귄은 비슷한 계통의 일을 꾸준히 하는 듯하더니 작년에 돌연 전업 싱어송라이터의 삶으로 전향해서 자기 앨범을 준비 중이다. 오늘 만난 이 둘만 유별난 게 아니다. 홀연히 제주로 터전을 옮긴 윤과 제주총각은 둘 다 살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하고 할 일을 찾은 사람들이다. 한 명은 자유인으로서 경험을 쌓다가 창의적인 숙박업 모델을 만들어 삼 년이 채 되기 전에 안착시킨 뒤, 그에 머물지 않고 올해 초 자신이 아직 조직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실험에 들어갔다. 제주총각은 마케터 경력을 살려 직장생활을 하면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로서의 삶을 개척하나 싶더니 최근에는 바다와 제주를 지키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찾아가면 항상 막냇동생처럼 살뜰히 챙겨주지만 그게 좋아서라기보다는 만날 때마다 새로운 삶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어서, 다르게 살 수도 있고 그래도 큰 일 나지 않는다는 증거를 확인하고 싶어서 나는 이들을 늘 보고 싶어 한다.

“제가 일하고 싶은 분야도 되게 여러 가지 세부 분야가 있더라고요. 그중에서 어디로 진입할 지부터 고민과 공부가 많이 필요한데 직장 다니면서 할 엄두가 안 났어요.“
“그 일을 하고 싶은 열정과 진심이 있는데 어디 한 군데로 들어갔다가 이거 아니다 싶으면 다른 데로 못 가겠어?"
“그러니까 제 말은, 이 안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견해와 대치하는 진영이 있는데 그런 게 정확히 어떤 거고 내가 어디에 서고 싶은지를 알고 싶다는 거죠.”
“그러니까~ 미리 다 알고 다 생각하고 가려고 하지 않아도 나중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바꿀 기회가 충분히 있다고. 조급해하지 말라는 거지.”

나를 향한 애정과 염려가 가득한 말인걸 알면서도 나는 또 나름의 생각이 있다며 철벽처럼 막아낸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인생을 더 산다 해도 닿지 못할 지점들을 경험한 사람이 해주는 말이니 분명 새겨들을만하겠지만 상대방도 알 것이다. 결국 내가 직접 경험한 뒤에야 ‘그때 그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다’며 찾아오리라는 걸. 그때 우리는 지금과 같은 패턴의 대화를 반복할 테고, 나는 또다시 같은 조언을 들을 것이다. 다르게 살 수도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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