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죠?
우리 동네엔 작은 미용실이 하나 있었다. 마흔댓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 홀로 운영하시는 적당히 낡고 아담한 가게. 어릴 적부터 난 그곳을 종종 들르고는 했다. 단지 집과 가깝다는 지극히도 단순한 이유였는데, 그때는 그게 꽤나 중요했다. 반강제적으로 머리를 자른 뒤 밤톨 같은 호섭이 머리를 누가 볼 새라 서둘러 집으로 뛰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호섭이가 이제는 다 커서 “박새로이 머리가 하고 싶지 말입니다” , 이런 대사를 잘도 뱉어댄다. 그때에 비하면, 나의 덩치도, 뻔뻔함도, 아주머니의 손주름도 이전보다는 많이 늘었을 거다.
작년에 지하철이 들어온 후로, 상가엔 여러 미용실이 연달아 생겨나기 시작했다. 완전 새삥 건물에 풋풋하고 젊은 알바생들로 가득 찬,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쥐드래곤이 되어 있는 그런 미용실 말이다. 그런 곳들에 비하면 이곳은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신나는 힙합 노래라든지, 이쁜 알바생 누나들이라든지, 하다못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없어 뜨거운 물에 맥심 커피를 휘휘 저어 마셔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인데.
그러나 가게가 허전하지는 않았다. 그 공백을 느낄 새라 아주머니의 수다들이 머리 틈 사이로 와글거리며 떨어졌다. “학생 숱이 진짜 많네~ 지금은 불편하겠지만 나이 들면 이게 또 장점이 되고 그런다? 호호호… 나도 젊었을 땐..” 대부분 이런 식의 대화가 오고 갔다. 아, 아주머니 혼자 나의 곱절은 얘기하셨으니 ‘웅변’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네.” 숱은 많아도 숫기는 없는 나의 대답은 항상 건조하다 못해 까끌거리기까지 했다. 어깨 위로 고즈넉하게 떨어지는 것이 머리털인지, 부담감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들은 종종 이유 모를 불편함을 자아냈다.
그로부터 몇달 뒤, 오랜만에 가게를 찾았다. 달리 이유는 없었다. 그앞 골목을 지나가던 길에 아주머니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 뿐이였다. 머리 사이에 늘러붙은 벚꽃잎을 요란스레 털어대며 입구에 들어서자 아주머니가 나를 반겨주셨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잘라줄까?” , “평소처럼요.” 나도 모르게 ‘평소처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손님, 메뉴는 뭘로 드릴까요?” , “늘 먹던 걸로.” 약간 이런 느낌이랄까
그날따라 가게는 유난히 조용했다. 평소 같았으면 시끌벅적해야 할 이 비좁은 공간을, 위잉 위잉 바리깡 소리만이 겨우 채워내고 있었다. 어색함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자 가게를 요리저리 둘러보니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칠이 벗겨진 벽지와 지극히 뽀글 파마 아줌마스러운 잡지들, 카운터 위에 박하사탕, 이 3박자가 고루 합을 이루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원래 있었던 것들인지 모르겠으나 그들은 아줌마의 수다 지휘를 잃어버린 갈 곳 잃은 브레멘 음악대 같았다. 그런 정적이 편하다고 느껴질 때쯤에,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나도 젊었을 땐 참 계절 많이 탔는데.. 봄만 되면 뛰쳐나가고 싶고, 여름엔 여름이라 뛰쳐나가고 싶고 그랬어. 벚꽃 하나 폈다고 막 호들갑 떨고, 음악 들으면서 울고불고 쌩쇼를 다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하.. 이게 참 나이가 드니까 다 무뎌지더라구. 그냥, 오늘 하루 잘 먹고 잘 살면 장땡이고, 뭐를 봐도 이젠 별 느낌도 없어. 봄이 와도 아무렇지도 않아 이젠”
아주머니는 웃고 계셨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네.” 나는 평소처럼 멋쩍은 웃음과 함께 무심한 대답을 지어냈다. 이게 당연한 거라 믿었다. 내게 있어 이곳은 ‘머리를 다듬는 곳’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제 아무리 아주머니의 개인사를 듣고 있다 한들 결국 이 이야기는 주머니에 찔러둔 만원이 없다면 듣지 못할 이야기, 딱 그 정도에게 그친다 생각하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아주머니는 머리카락을 쓸고 계셨다. 나는 서둘러 주머니에 꼬깃하게 접어둔 만원을 들이밀며 가게를 황급히 나왔다. 가게 앞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 건너려던 찰나에, 아주머니가 날 부르셨다. “학생, 머리도 짧은데 그냥 육천 원만 내고 가. 많이 받기가 그래서 그래.” 손에 사천 원을 쥐어주시고는 내게 작별인사를 건네셨다.
오늘도 평소처럼 그 가게를 찾아갔다. 사천 원을 건네받으며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하지 못한 것이 죄송스러워, 커피라도 사들고 가야겠다싶어 카페를 들렀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받아 가게 앞을 찾아갔을 때, 지난번의 작별인사가 마지막 인사임을 그때 깨달았다. 텅 빈 콘크리트 공사장을 10분 정도 멍하니 바라보다가 “괜히 커피값만 버렸네.” 투덜대며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그럴 줄 알았으면 커피를 2잔씩이나 들고 가지 않았을 텐데. 그럴 줄 알았으면 ‘감사합니다’ 한마디 정도는 건넬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뭐가 어렵다고, 말동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중얼거리며 무겁게만 느껴지는 발걸음을 억지로 떠밀었다.
나는 웃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믿고 싶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