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도 나는 김밥을 잘 말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치원 다니던 딸은 김밥보다는 유부초밥을 더 선호했고 속재료를 일일이 준비하는 게 번거롭고 버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도 못하냐”며 혀를 끌끌 차던 숙희 씨에게 김밥 강의를 들은 건, 엄마가 세상을 떠나기 한 달 보름 전 즈음이었다. 의사로부터 더 이상 치료 방도가 없음을 듣고 서울 소재 모 호스피스에서 2주 정도 지내다 집으로 돌아왔을 시기였다. 몸에 받는 음식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 사람 입이라 뭐든 넣으려 애쓰던 때였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부랴부랴 친정에 가니 엄마가 부엌에서 주섬주섬 김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처럼 먹고 싶었는지 재료를 미리 구비해 놓고 딸을 기다린 것이다.
“자, 이것들 좀 썰어봐.”
한창 건강하고 젊었을 적 엄마가 해왔던 재료 손질이 내 몫이 되었다. 코가 시큰해진 채로 지단을 부치고 당근을 볶고 햄을 썰었다. 엄마는 속재료가 크고 묵직하게 씹히는 걸 싫어했다. 카레에 든 감자도 손톱만 하게 깍둑 썰게 하더니 김밥용 햄도 새끼손가락보다 얇은 걸 원했다. 기력이 달리는 와중에도 숙희 씨는 본연의 음식 철학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렇게 두꺼운 걸 어떻게 먹냐. 더 얇게. 더. 더!”
예전 같았으면 “아 그냥 먹어요.” 하고 툴툴댔겠지만 아픈 엄마가 원하는데 뜻대로 안 해드릴 이유가 없었다.
재료 준비를 마치니 엄마가 시범을 보이겠노라며 아일랜드 식탁에 앉았다. 마지막 ‘잘 봐둬.’의 시간이었다. 잔뜩 마른 팔을 걷어붙인 숙희 씨가 늘 해오던 대로 재료들을 쌓고 본격적으로 말기 전에 설명을 덧붙였다.
“손가락으로만 하지 말고 손 전체를 쓴다는 느낌으로 해봐. 양 끝에서 살짝 중앙으로 모아주듯이 이렇게-!”
“힘 있게 잡아주면서 이렇게 말면 돼.”
“끝에 밥풀은 너무 많이 묻히지 말고.”
엄마새의 시범을 다 봤으니 이제 아기 새 차례였다. 방금 본 장면을 유튜브 재생하듯이 되새기며 눈앞의 김밥에 재현하려 애썼다. 어쭙잖은 손놀림이었지만 그럴싸하게 비슷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오, 제법 먹을만해 보이는군.”
엄마의 칭찬에 기분이 으쓱했다.(이 정도면 특급 칭찬이다.) 그렇게 몇 개를 더 말아서 점심 식탁에 올렸다. 나를 가르치느라 진을 뺐는지 엄마는 다 된 김밥을 많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다른 날보다는 조금 더 입에 들어갔노라며 씁쓸하게 미소 짓던 엄마의 얼굴이 선연하다. 이 날 먹은 김밥은 자라오며 늘 먹었던 그리운 그 맛 그대로였다. 엄마가 이번 생에 만들어 준 마지막 김밥이었다.
유년 시절,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엄마는 이따금 김밥을 말았다. 그땐 몰랐다. 그 많은 재료를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엄마가 부엌에서 잠시 왔다 갔다 하면 식탁 위에는 어느새 고소하고 향긋한 재료가 가득 쌓였다. 주홍빛 채 썬 당근에 달큼한 시금치, 빠지면 안 되는 햄과 연노랑빛 계란 지단, 그리고 새콤한 단무지까지.
나는 엄마 곁에 알짱대면서 계란 지단 꽁다리나 햄 조각들을 얻어먹는 걸 좋아했다. 아마 엄마 눈에는 냄새 맡고 찾아온 강아지처럼 보였을게다. 한 김 식힌 지단을 식칼로 가지런히 썰 때면, 엄마 옆에 붙어서 고수레를 기다렸다. 키를 낮추고 없는 꼬리를 흔들고 앉았으면 입 안에 계란 꽁다리가 들어왔다. 비록 길이가 맞지 않아 낙오됐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지단이었다.
그렇게 완성된 김밥이 탑처럼 가지런히 쌓였다. 꽃무늬 쟁반 위에 김밥 꽃이 핀 것만 같았다 우리는 오손도손 앉아 고소하고 슴슴한 행복으로 배를 가득 채웠더랬다.
나는 여전히 김밥을 잘 만들지 못한다. 식구들이 유부초밥을 더 선호하고, 엄마에게 배웠어도 번거로운 건 매한가지지만, 무엇보다도 김밥을 만들면 눈물이 자꾸 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아주 오랫동안 김밥을 만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