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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So Long, and Thanks for…

by 조하나


그녀의 날카로운 절규는 서늘한 고요로 변했다. 그녀의 폐 속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기까지 다 내뱉어 버린, 그녀가 속했던 ‘이전 세계’에 작별을 고하는 마지막 언어였다. 그 소리가 멎자, 세상의 모든 소리도 함께 멎었다.


그녀는 무너진 그 자리, 거친 모래와 뾰족한 산호 조각이 섞인 흙바닥에 뺨을 대고 있었다. 무릎에서 배어 나온 피가 흙과 엉겨 붙는 축축한 감촉, 방금 전까지 자신의 목을 찢고 나왔던 그 비명,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아득했다.


케빈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얼굴은 땀과 공포, 알 수 없는 분노와 충격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치고 있었다. “하나!”라고 부르는 것 같기도 했고, “앰뷸런스!”를 외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두꺼운 유리벽이 그녀와 세상 사이를 가로막은 듯 모든 것이 소리 없는 슬로우모션 판토마임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교육생들의 겁에 질린 얼굴들이 저 멀리 보였다. 한 사람은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아 울고 있었고, 다른 사람은 넋이 나간 채 어딘가를 응시했다. 그들의 공포조차 그녀에게 가닿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곳, 자신이 방금 미친 듯이 달려왔던 그 길, 클로드의 집으로 향하는 그 5분 남짓한 길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그곳. 그 ‘검은 그림자’. 그녀의 세계를 향해 마지막으로 돌아선 채 매달려 있던 그의 검은 등.


아니. 그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의 집 마당 평상 위 그녀의 가장 먼저 맞이했던, 단정하게 개어진 그 빨랫감들이었다. 낡고 색이 바랜 첼시 유니폼. 깨끗이 비워진 재떨이. 호텔처럼 팽팽하게 당겨 정리된 침대 시트.


그것은 마침표도 아니었다. 그녀를 향한, 그녀의 모든 기대를 향한, 완벽하게 계획된, 가장 잔인한 조롱이었다.


‘하나, 넌 아무것도 몰랐지? 내가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클로드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특유의 냉소적인 영국식 억양으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하나! 정신 차려! 하나!” 누군가 그녀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케빈이었다. 그제야 ‘철썩’ 하는 마찰음과 함께 막혔던 소리의 댐이 터져 나왔다. 저 멀리서 신경질적인 사이렌 소리가 섬의 평화를 찢으며, 그러나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케빈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을 때린 그 마찰음은 장막을 가르며 세상의 모든 소리가, 현실이, 거대한 파도처럼 그녀의 고막 안으로 다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린 것은 그녀 자신의 숨소리였다. 폐가 찢어져라 공기를 빨아들이는,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수면 위로 간신히 고개를 내밀었을 때처럼 그녀는 거칠게 헐떡였다.


그리고 더 가까워진 사이렌 소리. 섬의 유일한 포장도로를 달려오는, 이 낙원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 날카로운 쇠붙이 소리.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닌,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 확인하러 오는 잔인한 확증의 소리.


케빈이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녀의 다리는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흙먼지와 피가 범벅이 된 두 무릎은 꺾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다시 주저앉았다.


“하나, 제발, 정신 차려. 그들이 오고 있어. 네가… 네가 그들에게….” 케빈은 말을 잇지 못 했다. ‘네가 그들에게 클로드가 있는 곳을 알려줘야 해.’ 그 문장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 비극의 첫 번째 목격자이자 이제부터 시작될 이 모든 끔찍한 절차의 ‘증인’이자 ‘안내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작은 구급차와 낡은 경찰 트럭이 다이빙 센터 앞 흙길에 멈춰 섰다. 무표정한 얼굴의 두 태국 경찰과 구급대원이 내렸다. 그들의 시선은 곧장 흙먼지 범벅이 된 채 넋이 나간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맨 처음 발견했습니다.” 케빈이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경찰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태국어로 무어라 물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니, 알아듣고 싶지 않았다. “저쪽입니다.” 케빈이 결국, 손가락으로 그 길을, 그녀가 방금 전 오갔던 그 5분의 길을 가리켰다.


그녀의 몸이 기계처럼 반응했다. 경찰이 그녀의 팔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무리에 떠밀려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세 번째였다. ‘안 돼. 가고 싶지 않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그녀의 발이 모래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으려 버텼지만, 현실의 중력은 그녀를 가차 없이 끌고 갔다.


그 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재미가 꼬리를 흔들며 맞이했다.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온 게 그저 신기한 눈치였다. 그 순진무구한 환대가 눈앞의 이 기괴한 현실을 더욱 잔혹하게 만들었다. 경찰 하나가 재미의 머리를 무심하게 쓰다듬었다.


그녀는 차마 집 뒤편, 그 ‘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평상 위에 단정하게 개어져 있던 그 빨랫감에 가 닿았다. ‘저것 좀 봐. 클로드가 저렇게 단정한 사람이었어?’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죠?” 경찰의 재촉에 케빈이 그녀 대신, 손가락으로 집 뒤편을 가리켰다. 구급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경찰들이 뒤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움직임이 멈춰 섰다. 누군가의 나직한 탄식 소리, 혹은 짧은 욕설 같은 것이 들려왔다.


그녀는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상 위 깨끗하게 개어진 첼시 유니폼과 아무것도 모른 채 그녀의 손길을 기다리며 꼬리를 치고 있는 재미뿐이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아주 정교하게 짜인, 자신만을 위한 부조리극의 한가운데라고 생각했다.


사이렌 소리가 섬의 아침을 완전히 깨워버린 것일까. 어느새 다이빙 센터의 다른 강사들, 안드레와 줄리앙, 그리고 이웃 다이빙 센터의 사람들까지 클로드의 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충격에 휩싸인 얼굴과 이미 사실을 직시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섞여 기괴한 그림을 그려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순간, 그럴싸한 뮤지엄에서 한 점의 초현실화를 감상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잔잔한 파도 소리처럼 그녀의 귓가를 덮었다.


“어젯밤에도 바에서 봤는데… 대체 왜? 하나가… 하나가 처음 발견했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에게 ‘비극을 가장 먼저 발견한 자’라는, 주홍 글씨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의 동정 어린 눈빛의 뒷면은 호기심과 궁금증이었다. 그 시선들이 수천 개의 작고 가는 바늘이 되어 그녀를 쉴 새 없이 찌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또다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었다. 이곳은 섬이라 어느 방향으로 가든 결국 바다뿐이었다.


그때, 구급대원들이 무언가를 들것에 싣고, 하얀 천으로 덮은 채 집 뒤편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였다. 그녀를 이 섬에 붙잡아 주었던 가장 무거운 닻이, 그렇게 그녀의 눈앞에서, 이 섬의 유난히 평화롭고 아름다운 아침 풍경 속을 가로질러,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실려 나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센터의 낡은 나무 의자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감각은 마치 젖은 솜이 귀를 틀어막은 것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를 한 겹 막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닷속에서 이퀄라이징이 안 돼 먹먹하다 못해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게 되는, 자신과 외부 세계의 압력 평형 불능 상태에 갇힌 것 같았다.


무릎에서 흐르던 피는 이미 거무죽죽하게 굳어 흙먼지와 엉겨 붙은 채로 이제는 그녀와 한 몸이 되었다. 아침의 완벽한 사파이어 빛 하늘은 이제 한낮의 잔인한 백색광이 되어 이 모든 비현실적인 풍경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케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태국어와 영어를 섞어 가며 경찰들에게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지만, 그녀에게는 그저 물속에서처럼 웅웅거리는 저음으로만 들렸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안드레와 줄리앙은 넋이 나간 채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차마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텅 빈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드레는 의미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맥주병의 라벨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딱, 딱, 딱…’ 그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소리만이 온 섬을 채웠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무릎을 쳐다봤다. 거무죽죽하게 굳어버린 피와 흙먼지. 뾰족한 돌조각이 박힌 상처. 아프지 않았다.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했다.


‘나는 왜 여기서 피 흘리고 있지? 아, 넘어졌나보네. 언제?’


마치 모든 게 몇 년 전 일처럼 아득했다. 이 마비된 정적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때, 줄리앙의 주머니에서 ‘띵-’하는, 고요 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울리는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페이스북 알림이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본 그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맙소사….”


그의 휴대폰 화면에는 클로드의 계정에서 방금 전, 정각에 맞춰 올라온 게시물이 떠있었다.


“So Long, and Thanks for All the Fish.”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 떠나는 길에 돌고래들이 인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 그가 좋아하던, 그리고 그를 꼭 닮은 블랙 유머로 가득한 소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였다. 그는 미리 예약 메시지를 준비해 놓을 만큼 이 여정을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었다.


그 디지털 유령의 등장과 냉소는 슬픔과 충격에 잠겨 있던 그들을 순식간에 다른 차원의 분노로 밀어 넣었다. 그의 마지막 인사마저 이토록 잔인한 농담이라는 사실에 치가 떨렸다.


“아무도 몰랐어. 우리 중 그 누구도 몰랐어. 클로드, 이 나쁜 놈!”


안드레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클로드가 원래 좀 어둡고 냉소적인 사람이며, 세상만사 심드렁하고 게으른, 그래서 이 섬에 15년 넘게 갇혀버린 늙은 피터팬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케빈이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그들 곁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모두 고개를 들어 케빈을 바라 보았다.


“우리가 알던 클로드는 진짜 클로드가 아니야. 그가 처음 이 섬에 왔을 땐… 그는 태양, 그 자체였지. 그의 웃음소리가 이 해변 끝까지 들렸다고.”


케빈의 시선이 아득해졌다.


“그에겐 이 섬에서 만난 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어. 와이프나 다름없었지. 둘은 서로가 없이는 못 살았어. 그러다 그녀가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어. 길고 긴 암 투병이었지. 클로드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모든 걸 바쳤어. 돈, 시간, 그리고 그의 영혼까지. 하지만 결국 그녀는 떠났고, 그 뒤로 클로드는 많이 변했어.”


케빈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숨을 쉴 수 없었다. 클로드의 냉소와 무심함, 입으로만 웃던 그 기이한 습관, 그럼에도 숨길 수 없었던 그의 따뜻함이 떠올랐다. 삶의 전부인 것을 잃고 작은 섬에 갇혀 드넓은 바다로 나가면서 그는 어쩌면 이 날만을 간절히 꿈꿔왔을 지도 모른다.


줄리앙과 안드레도 그제야 조금씩 입을 열었다. 자신들이 처음 이 낯선 섬에 왔을 때, 클로드의 그 퉁명스러운 조언과 보살핌이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그의 은근히 사람을 언짢게 하고, 또 즐겁게 했던 블랙 유머가 어떻게 절망의 순간을 견디게 해주었는지.


그녀의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바로 그 아무것도 모른 게 죄였다. 그녀는 그저 어젯밤, 서울에서 돌아온 자신의 존재를 증명받고 싶다는 그 유치하고 이기적인 조급함에 사로잡혀 그의 공허한 눈빛을 그저 오독했다. 그녀는 그의 단정한 마침표를 눈치채지 못하고 끝내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알았다면? 만약 그의 고통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나는 그를 막을 수 있었을까?’


그녀의 자책은 이내 원망으로 바뀌었다.


‘왜? 왜 하필 지금이야. 왜 하필 나야. 왜 하필 그를 발견한 게 왜 나냐고. 왜 이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도록 한 거야. 왜 이 아름다운 곳에서 이 끔찍한 아침을, 이 완벽한 배신을 우리에게 남기고 간 거야? 이 진절머리 나도록 끝까지 이기적인 사람!’


혼자서만 조용히 준비한 그의 단정한 준비가, 그의 마지막 ‘히치하이커’ 농담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기억이 될지 그는 정녕 몰랐단 말인가. 너무 홀가분하게 떠나버린 그가 차라리 부러웠다. 자신은 떠나버리고, 이 섬에 그녀를 묶어둔 그가 참을 수 없이 원망스러웠다.


유난히 해가 긴 날이었다. 사람들은 흩어지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채 센터 주변을 맴돌았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무수한 질문들만 수수께끼 유령처럼 섬을 떠돌았다.


그녀의 눈에 새까만 털뭉치가 들어왔다. 재미는 이 모든 소란을,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아침 산책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 주인을 기다릴 뿐이었다.


재미는 다이빙 센터 뒷문 주차장, 클로드가 늘 스쿠터를 세우던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길 끝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계산하지 못한 기다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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