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번째 일기, 오늘 하루.

by 지승유 아빠

오늘 큰아이는 신여성 스타일이다.


머리는 머리끈 세 개를 이용해서 묶었다. 커다란 핀을 앞머리에 찔러 넣고, 두꺼운 바지와 티를 입었는데 무슨 생각인지 그 위에 여름 원피스를 입었다. 카키색으로 된 원피스인데, 딸아이가 좋아하는 여름옷 중 하나이다. 아마 입고 싶지만 계절상 입을 수 없어서 그랬던 것 같기는 한데, 원피스를 입고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았을 때, 아내는 칭찬했지만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운동화를 신고, 봄가을 점퍼를 입었다. 결정타는 목에 맨 목도리. 겨울에 주로 하는 목도리인데, 복슬복슬 토끼 꼬리 같은 모양이다. 이렇게 차려 입고 가방을 메고 방에서 나왔는데, 아내와 나는 보자마자 신여성 스타일이라고 외쳤고, 큰아이는 그게 뭔지는 몰라도 모두가 관심을 보이니 내심 즐거운 눈치였다.


그에 비해 둘째는 평범한 차림이었다. 유아답게 내복을 갖춰 입고, 그 위에 긴 상하의를 입었다. 봄가을 점퍼를 입었는데, 바람이 조금 불어 모자를 씌웠더니, 자꾸 벗어버려서 나중에는 포기해버렸다. 작은 아이의 결정타는 원래 누나 것이었던 뽀통령님 자동차. 키가 큰 편인 작은 아이에게는 많이 작게 느껴지지만, 그 자동차에 앉아서 자신을 밀고 가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와 아이 둘은 걸어서 이동하며, 운전하여 목적지로 향하는 아내를 부러운 얼굴로 바라보게 되었다.

작은 아이는 아침 7시에 일어났다. 내 옆에서 앞구르기, 뒷구르기, 옆구르기를 하더니 앉아서 눈을 비빈다. 그리고 이내 실눈을 뜨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서는 이상하게도 아주 똑똑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가자.

넌 왜 엄마 안 깨우고, 꼭 아빠를 깨우니?


둘째는 대답이 없다. 방문을 열고 나가서 바지를 내리고 전용 변기에 소변을 해결하고는 장난감 방에서 산더미 같은 종이컵을 가져온다. 탑을 쌓기도 하고, 아빠에게 던지기도 하고, 한 줄로 쌓고는 발로 차서 쓰러뜨리기도 한다. 누나가 합류하자, 종이컵의 수는 더 많아지고 종이컵이 사방에 눈처럼 떨어진다. 아내와 아이들이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만들어낸 놀이이다. 세상에 종이컵으로 이렇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이 있을까.

종이컵 놀이를 마치고, 아침을 먹고, 거실 창을 열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온통 좋은 냄새가 가득이다. 꽃향기도 나고, 풀향기도 난다. 길 위는 온통 꽃잎이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로 꽃길이 되었다. 먼지를 털고 청소를 한 바탕하고 보니, 아이들은 좀이 쑤시는 눈치.


산책을 시작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먼저 이를 닦여야 한다.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아이들을 잡아 이를 닦여야 한다. 간절하게 말할수록 아이들은 더 킬킬거리며 도망간다. 그래서 간절해 보이지 않도록 연기한다. '닦던가 말던가'의 태도를 보이며 근처를 배회하다가 한 명씩 잡아 아내에게 넘기면 된다. 오늘 작은 아이는 아내의 몫이고 큰아이는 나의 몫이다. 큰아이의 앞니는 몇 달에 걸쳐 자라고 있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자라서 나중에 교정을 해야 하나 걱정이었는데, 오늘 보니 반듯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큰아이와 서로 감탄하니, 아내와 작은 아이도 합류해서 감탄했다.

아이의 이를 닦이고 다면 화장실을 다녀오게 해야 한다. 아직도 둘째는 불안하다. 타이밍을 잘 맞추지 못하면 바지에 소변을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변기를 들고 다가가면 작은 아이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역시나 도망간다. 오늘은 냉장고 옆에 빈 공간을 숨는 장소로 골랐다. 소리 지르며 '음파 공격'을 시행하지만 어림없다. 옷을 입히고 아이들을 밖으로 내몰면 온통 기운이 빠진다. 하지만 시원한 공기와 볕 속을 아이들과 함께 걷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거리에 사람은 없다. 큰 아이는 동생이 탄 낡은 자동차를 밀며 꽃 길을 독차지한다.

큰아이는 자전거로 월드컵 경기장 주변을 달렸다. 나는 작은 아이의 자동차를 밀며 그 뒤를 따르고, 자동차는 물이 고인 곳을 통과해서 달렸다. 작은아이는 바퀴에 물이 갈라져가는 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는 중이다. 아내와 나는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걸었다. 큰아이는 한참 달리다가 기다리고, 다시 한참 달리다가 기다린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돌더니 멈춰 서서 가방의 물을 꺼내 마시기도 하고, 동생에게도 물을 먹이고 다시 달려가기도 한다. 큰 아이의 뒷모습이 너무 당당해서 웃음이 났다.


경기장을 몇 바퀴 돌고 나자 다들 배가 고파왔다. 돈가스집으로 가서 포장을 주문했다. 식당에 손님이 많았지만 그 많은 손님들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었고, 우리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을 식당 역시 감당할 수 없을 터였다. 그래서 아이들은 차에서 장난을 치고 나는 포장을 주문했다. 집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둘째는 낮잠을 자고 큰아이는 엄마와 함께 오늘 분량의 공부를 시작했다.

둘째는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꾀를 부리고, 결국 나는 오랜만에 아이를 안고 재웠다. 실눈을 뜨고 장난을 치던 아이는 살살 흔들며 노래를 불러주자 조금씩 잠이 들어간다. 원래 슈퍼맨을 좋아하던 둘째는 요새 아톰을 좋아한다. 아마 이따 밤에 잠이 들 때는 '아톰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것이다. 작은 아이를 눕히고 거실에 나오니 큰 아이는 엄마와 마주 앉아서 수학책에 몰두하고 있었다. 신여성 차림 그대로 앉아 입을 삐죽거리며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얄밉게 느껴져 장난치려다가 아내 눈치가 보여 후퇴했다.


오늘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냈다.


아내는 이번 주 들어 어깨가 계속 아프다. 둘째 출산 이후로 좋지 않았던 허리도 아파온다. 어제는 병원에 가서 침을 맞고, 찜질을 하고 왔다. 뜸을 뜬 자리가 너무 붉게 달아올라서 안쓰럽게 느껴졌다. 나는 어깨가 조금 욱신거리고 피곤하다. 직장에서는 안 하던 일을 조금씩 시도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이고 걱정이 된다. 큰아이는 학교를 못 가서 불만이고, 빨리, 새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의 얼굴이 보고 싶다. 좀 더 격렬하게 놀고 싶은데 무엇인가 욕구불만인 듯싶다. 그래서 욕구불만을 독서로 해결하고 있다. 큰아이가 지나간 길은 책더미가 남겨진다.

우리 막내는 요새 가장 행복한 남자이다. 누나가 아침부터 놀아주고 어디 가지도 않는다. 어린이 집에 가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집에만 있으니 말랐던 둘째의 턱살이 이중이 되고 팔다리가 통통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 극히 평범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사실 온 가족이 붙어 있으니 큰소리가 나기도 하고, 아이들은 몸싸움을 하며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작은 불만들이 지금 우리 가족의 삶을 흔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아이들이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하고 있으며, 너무 함께하고 있어서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소중하다. 일상에 불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아이들을 본다. 둘째의 행복한 모습에서 나의 불만을 반성하기도 하고, 큰아이의 집중력과 아내의 헌신적인 보살핌에서 존경심을 느끼기도 한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오래도록 함께하는 시간은 우리에게 큰 불만의 싹일 수도, 튼튼한 공동체의 기반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잠든 모습을,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우리 가족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그 올바른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닌, 아내와 우리 어린 두 아이들임을 확신한다.


해가 질 때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라산에 눈이 왔다고, 온통 하얀 산길 사진을 받았다. 아내는 아이들과 눈 속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바람이 좀 많이 불었지만 우리는 끄떡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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