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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호미 Jul 06. 2024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눈탱이밤탱이

신체적 부상을 입었을 때에 대해 써라





나와 가장 가깝고, 자주 마주치는 남자는 내 반려인이다. 그는 내게 종종 '어쩜 그렇게 한 번을 안 지냐'며 푸념했다. 우리는 자주 싸우는 편이 아니라서, 반려인이 말하는 건 우리끼리 하는 유치한 장난 같은 거다. 예를 들면 반려인이 장난스레 내 어깨를 툭 치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려인의 어딘가를 타격한다. 그럴 필요가 없는 약한 강도임에도, 마치 되갚아주려는 듯이.


처음엔 의식하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내가 정말 반사적으로 참지 않고 반격을 가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나는 왜 그러는 걸까?




나는 평균 여성보다 키가 큰 편이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컸고, 중학교 1학년때까지는 어지간한 남자아이들보다도 컸다. 나는 산만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얌전한 아이도 아니었다. 학교 수업은 집중해서 들었지만, 하교 후에는 운동장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는 활발한 아이였다. 내 무릎엔 항상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그날도 교실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위험하니 뛰지 말라는 선생님의 말에도, 우리는 다 같이 망아지처럼 뛰었다. 누가 누구의 뒤를 쫓는 것인지도 모르게 뒤엉켜 뛰었다. 큰 키 때문에 비교적 시야가 높았던 나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잘도 피해 다녔다. 하지만 잠시 뒤를 돌았다 다시 뛰는 순간 사고가 나고 말았다.


반대쪽에서 달려오던 남자아이 하나와 제대로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그 아이는 나보다 키가 작았기에 그의 단단한 이마가 부딪힌 곳은 내 눈이었다. 나는 눈 두덩이를, 남자아이는 이마를 부여잡고 바닥에 뒹굴었다. 


결국 나는 눈에 큰 멍이 들었다. 집으로 가자 이미 엄마는 선생님으로부터 상황을 들은 후였다. 엄마는 그래도 조심 좀 하지 그랬냐며, 여자애 얼굴이 속상하게 이게 뭐냐고 했다. 눈탱이밤탱이가 된 나를 발견한 아빠는 화가 난 듯 보였지만, 남자아이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다는 엄마 말에 그냥 넘어갔다.


사실 아이들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였기에 쌍방과실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과를 받았다. 당사자끼리는 원만하게 합의했으나,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었다. 눈에 든 멍이 빠지기 전까지는 나는 남자 선배들에게 눈탱이밤탱이로 불리는 모욕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급식실에서 오빠들을 째려보며 식판을 세게 쥐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때 이후로 눈탱이밤탱이가 된 적은 없었지만, 눈탱이가 퉁퉁 부을 정도로 남자아이와 싸웠던 적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4~5학년 즈음의 일이다.


그날은 학교에 안 가는 날이었지만, 나는 오후 내내 친한 친구와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신나게 그네를 타는 우리가 못마땅했던 건지, 얼굴만 아는 다른 반 남자아이가 내게 시비를 걸었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굉장히 약이 올랐다는 것은 기억난다. 결국 나는 그 아이의 시비에 휘말려 주먹과 발차기를 주고받으며 싸웠다. 남자애와 여자애가 그 나이에 몸으로 치고받고 싸운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마 내가 키가 큰 탓에 그다지 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서로 지친 나머지 자연스럽게 싸움은 끝났지만, 나는 맞은 부위가 상당히 아팠고 씩씩거리며 집으로 달려갔다. 가만히 있던 내게 싸움을 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나는 걱정스레 뒤따라온 친구와 함께 당시 상가 2층이었던 우리 집으로 들어가다 현관에서 엄마와 아빠를 마주쳤다. 부모님은 막 외출하려던 참이었고,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자 서러움이 몰려와서 펑펑 울었다.


무슨 일이냐며, 당황한 엄마의 물음에 나는 울음 반, 호흡 반이 섞인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놀란 엄마는 남자아이가 너를 발로 차고 때렸다고? 누구 집 아들인데?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이자, 부모로서도 적당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아빠의 반응은 달랐다. 아니, 이상했다.


"맞고만 있었어? 아니면 너도 때렸어?"


나는 씩씩거리며, 나도 발로 차고 주먹으로 막 때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빠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잘했어, 절대 맞고만 있지 마. 한 대 맞았으면 너도 한 대 때려야 해."


그 이후의 상황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 부모님들끼리 이야기해서 잘 풀었는지, 그 이후로 그 남자아이가 내게 시비를 거는 일은 없었다. 나는 아빠가 그날 했던 말과 아빠의 표정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러니까 내게 아주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빠의 말은 내게 일종의 신념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딜 가나 꼭 앙숙으로 지내는 또래 남자아이가 있었다. 유치한 장난이나 시비를 무시하지 않고, 일일이 복수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빠의 말처럼 맞고만 있지 않으려고 말이다.


성인이 된 나는 이성적으로 남성이든 여성이든 굳이 싸우지 않고도 잘 지내려 했지만, 초딩처럼 장난을 거는 반려인에게만큼은 어렸을 때처럼 반응했다. 아빠의 말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신념으로 심긴 나머지 마치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무조건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내가 알아낸 사실을 반려인에게 말해주자,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아부지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그러게, 아빠는 여자 아이인 내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는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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