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토리 Nov 20. 2024

그저 쓰는 사람이 될게요

계획하는 것에 서툴다. 시험 대비 공부계획도 여행 계획도 인생 계획도 사실 서툴다. 무언가 계획을 하려고 들 때마다 이제는 몸을 사리기도 한다. '원래 계획을 잘 못하기도 하고 그럴 시간도 없어.'라고 스스로 핑계를 대기도 하지만 남몰래 숨겨놓고 있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계획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밀려오는 좌절감 탓이다. 계획의 시작은 늘 선명하지만 그 끝은 흐리멍덩하다. 


새해가 밝아 올 즈음 새 다이어리를 사는 재미에 들인 적이 있었다. 올 한 해도 뭔가 해보겠다고 목표와 온갖 계획들을 장황하게 적어놓곤 했다. 그것들을 숫자로 나열하며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했다. 20대 때 유행했던 <꿈꾸는 다락방>, <시크릿> 같은 자기 계발서를 보면서 하고자 하는 일들과 원하는 것을 글로 적어놓고 상상하고 이미 이루어진 것 마냥 일기를 쓰기도 했다. 글로 나의 계획들을 적는 순간만큼은 즐거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다였다. 이행되지 않은 계획들은 또박또박 잘 쓰인 '예쁜 계획'에 불과했으므로 즐거움은 찰나의 시간으로 종결되곤 했다.  


작가라는 목표를 세우고 브런치에 2일에 한 편씩 글을 써보자는 계획을 했었다. 실패 후 일주일에 최소 1개 글을 올리자고 변경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예쁜 계획'이 되어버렸다. 


숱한 계획의 실패를 겪을 때마다 더 이상 계획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인생을 계획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어차피 무슨 일이든 계획대로 되지 않는 법인데 무슨 또 계획이야.' 구시렁대며 계획하고 싶은 마음을 내팽개치기도 했다. 나름 굳게 먹은 마음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마음에 균열이 간 건 책 한 권 덕분이었다.  


스물다섯에 함께 살았던 룸메이트가 신세 한탄이나 하며 매일 글쓰기로부터 도망치던 내 책상 앞에 붙여 주었던 쪽지가 있다. 

"작가란 오늘 아침 글을 쓴 사람이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세계였다. 단지 오늘 아침 일어나 글을 쓰면 되므로, 물론 늦된 내가 그 말의 진짜 의미를 깨달은 건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의 일이었지만. 그리하여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삶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최고의 작가가 되는 것은 어렵더라도, 매일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동네 수영장에서 제일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되긴 힘들겠지만, 일주일에 세 번 수영 수업을 빠지지 않고 가는 것, 그래서 자유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 김신지 『평일도 인생이니까』中


김신지 작가의 글을 보고 한 동안 멍한 상태로 앉아있었다. 그간 나의 계획과 목표 따위는 내 세계에서 힘써볼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무언가였구나. 그러면서 깨달았다. 항상 거창한 계획 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음을. 완벽한 계획과 목표만 있었지, 실천가능한 행동에 대한 계획이 없었음을그러다 문득 김종원 작가가 어디선가 한 말이 떠올랐다. 


"저는 1년에 책을 한 권만 읽습니다. 읽고 또 읽고 실천합니다. 책을 읽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그 책을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책을 읽고도 생각과 행동에 변화가 없는 것, 계획을 세워 놓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비슷한 맥락의 말처럼 와닿았다. 중요한 것은 행동하여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제는 나의 세계에서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간 오전에 '노트북 전원을 켜는 것'이 내가 정한 계획이다. 노트북을 켜는 것은 곧 글을 쓰라는 말과 같지만 나는 더 이상 글쓰기를 목표하는 계획은 세우지 않기로 했다. 그저 노트북 전원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완벽한 계획을 대신하기로 했다. 


노트북을 켜고 한 줄이든 두줄이든 글을 썼으면 혹은 글의 방향과 제목을 정했으면 그걸로 됐노라고. 노트북 앞에서 결국 글을 못쓴 날에는 독서와 사색이라도 하자고. 이것 역시 글쓰기의 일부라고. 오늘 글을 썼으면 나는 이미 작가인 거라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연말이다. 곧 새해가 밝으면 나는 새로이 다짐을 하겠지. 책을 내겠다는 둥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둥 완벽하고 예쁜 계획은 더 이상 다이어리에 적지 않는다. 그저 자주 노트북을 켜고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그거면 나의 세계에서는 이미 충분한 것이다. 누가 나에게 내년 계획을 물으면 "그저 읽고 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제 계획이에요."라고 답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