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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May 04. 2020

나는 가야 할 때 가기로 했다

후회라는 감정에 대한 단상

무심코 버킷리스트를 꺼내봤다. 지금껏 내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훑어보다가 어느 한 줄에서 눈길이 멈췄다.



 버킷리스트 80. 캠핑카에서 살아보기


서른 살 때부터 버킷리스트를 쓰기 시작했으니까 '캠핑카에서 살아보기'라는 꿈을 가진 건 30대 중반 즈음이었던 것 같다. 버킷리스트에 '캠핑카에서 살아보기'를 추가하던 그때의 나로 필름을 되돌려보면, 그땐 빨라야 60대 이후에나 가능한 꿈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돈도 돈이지만, 네 가족이 함께 캠핑카 안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때까지 내 마음에 드는 캠핑카가 없기도 했고... (그때만 해도 트럭 캠핑카가 대부분이었는데 나는 교통사고 현장을 여러 번 봐서 그런지 트럭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작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모든 일들이 나비효과처럼 연쇄반응을 일으켜 내 집을 캠핑카로 바꿔놓았으니, 가끔은 인생에 계획을 세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아내가 갑자기 대학원에 가게 되면서 2년간 혼자 살게 됐고, 때맞춰 내 마음에 드는 캠핑카 모델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캠핑카 가격을 보고는 이내 절망, '20년 후에는 살 수 있겠지?' 하며 꿈을 이쁘게 접어 마음속에 구겨 넣고 있을 때 날아든 소식 하나,

"캠핑카 법 개정으로 캠핑카 가격 상승 예상"

(대신 중고로 사서 개조하는 게 가능해져서 진입장벽은 많이 낮아졌다. 나 또한 시간만 많이 주어졌다면 중고차를 사서 개조하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마음이 바빠졌다. 눈여겨보던 캠핑카업체에 전화했더니 2주 내로 결정하지 않으면 올해 모델의 캠핑카 재고가 다 떨어져서 내년에 개정되는 캠핑카 법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했다. 계산기를 두드렸다. 법 개정으로 추가되는 세금(대략 2-3백만 원)과 캠핑카 베이스 차량(르노 마스터)의 페이스리프트로 인한 가격 상승분.. 캠핑카에 살게 되면 아끼게 될 돈(집 월세, 전기세, 수도세, 관리비 등)도 계산에 넣었다. 그래도 결정이 쉽지 않았다. 캠핑카가 한두 푼이어야 말이지...


지금 가야 하는가, 나중에 가도 되는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멋진 할배, 버트 먼로(영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인디언'의 실제 주인공)의 한 마디가 큰 도움이 됐다.


가야 할 때 가지 않으면, 가려할 때 가지 못한다.

- 버트 먼로(1899-1967)


나는 가야 할 때 가기로 했고, 지금 캠핑카에 산다.


내 버킷리스트를 훑다 보니 캠핑카 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슬라이드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필름의 끝을 잡고 더 멀리 내가 걸어온 길을 되밟아 갔다. 후회되는 일들이 참 많았다. 되돌릴 수 없어 슬펐다.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는데도 후회라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때, 지난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속삭였다.


"그때 있었던 일 있지? 그때 많이 힘들었잖아... 왜 하필 그때 그런 결정을 했을까?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싶었던 날들... 그런데 그거 알아? 그때 그 일이 없었다면 네가 지금 여기 있을까? 뜬금없이 무슨 소리냐고? 이렇게 좋은 날, 후회라는 감정에 닻을 내리고 눈 앞의 경치는 느끼지도 못하고 있으니 하는 말이야. 너도 후회하고 싶지 않다고? 그럼 지금부터 후회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줄게.

할 수 있는 한, '지금 당장' 행복을 느끼면 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지금 당장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게 후회라는 감정을 없애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야. 지금 행복해버리면 '영원히 후회로 남을 것 같은 그 일 조차도 지금의 행복을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해지거든'.

어떻게 하면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냐고? 일단 '주어지지 않은 것에 불평하지 않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이거보다 행복을 느끼는 쉬운 방법, 아직 나도 찾지 못했어. 일단 지금 눈 앞의 풍경을 즐겨보는 거야. 지난번에 내가 '아름다움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다가온다'고 했지? 니 앞에 보이는 풍경, 하나하나 뜯어볼까? 이게 어디 당연한 게 하나라도 있냐, 이 말이야.

일단 지금 창가에 내려앉은 저 햇살, 이건 지금 태양이 보낸 빛이 아니야. 태양 빛이 지구에 닿기까지 8분 30초가 걸리니까 8분 30초 전에 태양이 내게 보낸 조명인 셈이지. 날 위해 저 먼 곳에서 조명을 내리다니, 게다가 그 조명은 이 캠핑카에 전기도 만들어줘. 하루도 빠짐없이... 너무 멋지지 않아? 저 앞에 탁 트인 바다와 바닷가는 수십억 년 동안 지구가 물의 순환을 통해 쉼 없이 해수면을 변화시킨 끝에 만든 선물이고, 파도 소리는 달과 바람이 보낸 BGM이지. 달과 지구의 인력 때문에 생기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바람이 파도를 만드니까 달과 바람은 날 위한 DJ라고도 할 수 있지. 바다 위에 떠 있는 저 아름다운 섬은 또 얼마나 예쁘니? 사시사철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맑은 공기를 선물하는 저 나무하며, 내 뺨을 스치는 적당한 습기를 품은 바람과 자유의 냄새... 여기에 더 바랄 게 있니? 없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야. 그걸로 된 거라고.

하나만 덧붙일게. 한 인터뷰어가 톨스토이랑 인터뷰를 했는데, 톨스토이에게 당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과 가장 중요한 시간을 말해달라고 했어. 톨스토이가 말하길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당신입니다"라고 했대. 앞으로 니 인생에서도 '지금 이 순간'만 챙겨. 지간 일은 되돌릴 수 없고,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버킷리스트를 집어넣으며, 눈 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후회라는 감정을 느꼈던 지난날을 마지막으로 후회했다. 그리고 다시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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