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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율 Jan 16. 2022

바오밥나무

나무

 

사진: 한 율


아직 기억하니? 우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읽었던 어린 왕자 속의 바오밥나무 이야기 말이야. 뿌리가 거꾸로 자란대. 참 이상하지? 이런 건 실제로 없을 거야.’ 어릴 적 나눴던 대화가 몽글몽글 피어올라 좁은 방 안에 두둥실 떠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뜬구름을 잡는 듯 허무맹랑했지만 가장 높은 꿈을 꿀 수 있었던 유년 시절은 그렇게 기억 속 몇 개의 웃음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기억들로 소박하게나마 웃음 지을 때 거기에 너의 숨결이 서려 있음을 나는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너를 이제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예고 없이 멈춘 너와의 만남이 현실이 되자 그간의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가시처럼 뾰족해진 기억은 마음속 곳곳에 울긋불긋 생채기를 냈다. 그래서 그 상처들이 조금이나마 아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너에게로 가는 길에 무성한 시간이 쌓였음을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이 희미한 과거 속으로 시간을 되감듯이 나도 너를 만나기 위해 거꾸로 자란 바오밥나무의 뿌리처럼 기억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억 속의 가장 멀고 높은 곳에 너를 올려두었기 때문이다. 너는 아마도 바오밥나무의 꼭대기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기억 속은 무성한 잎과 가지를 드리우고 진한 풀냄새를 풍겨오는 여름철의 숲과 같았다. 다만 실제의 숲과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그것은 기억이 내뿜는 향기의 농도가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비교적 최근에 경험한 일들은 기억의 향기가 진했으나 오래 전의 일들은 희미한 잔향만을 어렴풋이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들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시간이 절대 씻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들은 대개 세월이 지나도 옅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한 향을 발산한다. 오랜 시간 생각하려 하지 않은 기억의 향기가 아직까지 코끝에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바오밥나무 꼭대기에 있는 너에 대한 기억의 향기일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 향기를 의식적으로 피했겠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그것들을 엮어 일종의 나침반으로 활용하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기억의 숲은 세상이 잠시 쉬어가는 고요한 새벽에만 입장을 허용하였다. 방안의 시곗바늘 소리가 선명히 들릴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숲 안은 시간에 따라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는 기억과 그와는 상관없이 무질서하게 엉킨 기억들로 빼곡하게 차 저마다의 생명력을 내뿜고 있었다. 그중 기억들이 가장 빽빽하고 울창하게 얽혀있는 한 곳이 눈에 띄었는데, 직감적으로 그곳이 내가 가야 할 길임을 알 수 있었다. 여러 향기들 사이에 코 끌을 감돌던 익숙한 그 향기가 섞여있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험난한 여정이 되겠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너를 먼 곳에 홀로 두었다는 생각이 들어 입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너를 만나러 가는 여정은 험난했다. 넝쿨진 기억들 사이로 자주 길을 잃었고 발을 디딜 때마다 그 기억이 올바른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억 속에 있었지만 기억할 수 없는 것들과 자주 마주쳤다. 기억의 수풀 속 검은 낭떠러지에 빠져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그럴 때마다 의도적으로 지웠던 기억들이 떠올라 매우 힘들었다. 분간할 수 없는 기억들 사이에 뒤엉켜 한걸음 한 걸음씩 더딘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 눈앞에 어렴풋이 바오밥나무의 형태가 드러났다. 한눈에 봐도 상당한 거리였지만 그건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기억들의 숲에서는 일단 눈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바오밥나무에 다다랐다. 예상했던 대로 너는 바오밥나무의 꼭대기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웅크려 앉은 너의 모습이 웅장하게 가지를 뻗은 바오밥나무의 모습과 대조적이었다. 막상 너의 앞에 서니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나간 시간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무거운 질문들을 입안에 가득 머금고 있었지만 쉽사리 꺼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진난만하게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네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너는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기억 속의 너는 어린아이의 시간에 멈춰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답을 찾을 수 없기에 기억의 깊은 곳까지 들어왔지만 여기서도 끝내 답을 찾을 수 없겠구나.’ 복잡한 감정들이 바람처럼 나를 에워싸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너는 그런 나를 보며 말없이 옆에 앉으라고 손짓하였다. 먼 길을 돌아왔는데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옆에 앉았다. 다행히 어색하지는 않았다. 말 대신 스쳐 지나갔던 많은 기억들이 소리를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어느 순간 시곗바늘 소리가 귓가에서 작아졌음을 느꼈고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해왔던 여정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때 내가 너를 만난 것인지 아니면 만났었다고 믿는 것인지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너의 존재가 기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음을 그날의 만남에서 다시금 느꼈기 때문이다. 살아있음에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많은 것들을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가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렇게 세상은 또 다른 여름을 맞이한다. 울창한 숲 속을 뒤덮은 풀냄새 속에서 이따금씩 그것과 상반된 존재가 내뿜는 향기에 코끝이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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