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회. 묵묵히 지켜낸 이야기
겨울의 시간은
이제 봄기운에 무뎌진 채
조용히 멀어지고 있다.
눈으로 덮였던 대지도
어느새 황톳빛으로 드러나고,
그 위로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새로운 싹이 피어오른다.
시간은 흘러
잊힐 것들은
조금씩 저만치 멀어지고,
숙연한 머뭇거림 사이로
초연해진 내 모습이
슬픈 계절의 안녕을 받아낸다.
그 안녕은,
서운함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온통 적셔놓고 간다.
먼지 낀 내 창가에 앉아
겨울의 기억들을 바라본다.
소복이 쌓인 추억의 이미지들—
그 안에 파묻힌 내 모습이
조용히 젖어든다.
나는,
내 사랑, 내 여인을
목이 메도록 부르고 또 부른다.
그리움의 흥분과 초조함이
내 몸을 지치게 해도,
사랑했기에 잊고 싶지 않고
야속했기에 지우고 싶지 않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백합처럼 피어나는 빛이 있다.
하얗게 피어난 그 기억의 밤을
나는 맞이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모든 건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시련이라고.
나만의 외사랑도,
너만의 미움도 아닌,
우리 둘이 함께 걸어가는
진실한 만남의
진득한 이야기라고.
지금의 나, 그때의 너에게 말을 걸어봅니다.
그때의 너야,
겨울이 떠나는 그 틈을
너는 그렇게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구나.
눈이 녹아 드러나는 대지처럼
너의 마음도 천천히
기억 속에서 살아나고 있었던 거야.
서운함에 젖고,
추억에 파묻히고,
다시 사랑을 부르던 너.
그 부름 속엔
절절한 외침도 있었지만,
무너지지 않는 믿음도 있었지.
사랑했기에 잊지 않으려 하고,
야속했기에 지우지 않으려 했던 그 마음.
그건 너의 순결한 용기였어.
백합처럼,
어둠 속에서도 환히 피어나는 너의 사랑.
그건 끝이 아니었어.
지금의 나는 알아.
그때의 너는
시련을 견디며
우리의 이야기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었던 거야.
참 고맙고,
참 아름다웠던 그때의 너.
지금의 내가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건
바로 너 덕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