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 또 뜯어야 할 것 같아" "시금치도 수확하자" 요즘 이쁜이들 단톡방은 텃밭 채소들 이야기에 복작거린다. 비즈니스나 정치가 아닌 활기 넘치고 설레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작은 잎들이 활짝 날개를 피며 나날이 예뻐지고 어떤 것들은 열매를 준비하려고 꽃을 피우기도 하면서 애쓰고 있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중 하나! 오늘은 시금치를 수확하기로 했다. 시금치 씨를 뿌린 지 40일이 되어가니 이제 식탁 위로 올라와도 손색없을 만큼 잘 자랐다. 시금치와 루꼴라를 같은 텃밭에 심었는데 둘의 모양이 비슷해서 헷갈렸지만 뭐 아무렴 어뗘랴. 시금치에 루꼴라가 섞이면 어떻고 구별 못한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작은 씨앗에서 푸른 잎들이 이만큼 자라났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호미로 뿌리 아래쪽을 살짝 파내듯이 하면서 살짝 들어 올리니 순조롭게 뽑혔다. 시금치와 루꼴라를 뽑고 옆 자리로 옮겨 쌈채소밭에서 상추를 비롯해 각종 채소들을 한가득 수확했다. 상추를 딸 때 코를 자극하는 청량한 풀내음이 좋다.
(실적이 제법이다.)
농사 후 새참을 챙기는 농부 흉내를 내보려고 과일과 떡을 가지고 와서 출출한 배를 달랜다. 그것도 농사라고 제법 땀도 나고 허기도 진다. 시원한 맥주를 한잔씩 컵에 따르고 분위기를 내며 건배를 한다. 물론 알코올이라곤 0.01도 들어있지 않은 무알콜이다. 종교적 이유도 아닌 의학적 이유로 우리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분위기까지 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무알콜 맥주로 분위기를 내본다. 색깔과 거품으로만 보면 비주얼은 맥주와 싱크로율이 100%다. 맥주도 한잔씩 했으니 이제 다시 일하러 가보자.
시금치와 루꼴라를 다 캐낸 땅은 이제 다시 시작이다. 땅을 놀릴 수 없다며 우리는 그 밭에 고구마를 심기로 했다. 작은 땅이라 많은 양을 심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보자 했다. 고구마 모종 심는 방법을 또 배워가며 살짝 눕혀가면서 줄을 맞춰 심었다. 농사는 배울 것 천지인 일이다. 힘도 하나 없어 보이는 저 누워있는 줄기아래로 고구마가 달린다니 신기를 넘어 신비한 일이다. 그 신비를 만들어 내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또한 놀랄 일이긴 하다. 고구마 줄기와 적정한 물과 바람, 그리고 햇빛의 콜라보 작품을 기대하시라. 거기에 우리의 정성 한 스푼 이런 건 유치하니까 넘어가자.
(고구마가 과연 몇 개나?)
"이것은 채소밭인가? 꽃밭인가?"
우리 밭에 꽃 같은 채소가 피어나 양재 꽃시장 부럽지 않은 꽃밭이 되었다. 이름도 생소한 유러피안 쌈채소들을 심었는데 정말 복스럽게 자라났다. '유러피안'과 '복스럽게'가 어울리는 단어인가? 아무튼 유러피안 채소 맞고 내가 보기에 복스러운 거 맞으니 조화롭다고 치자. 사실 그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했다. 다양한 채소를 모아서 뭉쳐놓으니 아름다운 신부의 부캐가 떠올랐다. 이것들은 뿌리째 뽑아서 밑동을 잘라 샐러드로 활용하면 좋다. 이쁜 모양만큼 맛도 아주 이쁘다. 추천하는 모종들이니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서 심어보시길.
(너무 예쁜 거 아니냐고)
아래 사진은 수확 대기 중인 채소들이다. 쌈채소나 시금치에 비해 수확하는데 시간과 정성을 더 많이 필요로 하긴 하지만 그만큼 나를 더 설레게 하는 아이들이다. 감자밭을 솎아주느라 뽑은 감자의 뿌리아래 '나 이래 봬도 감자라고!' 하면서 작은 알갱이가 매달려있다. 기특한 녀석! 땅밑에서 애쓰고 있었구나 싶어서 고마웠다. 감자가 여유롭게 달릴 수 있도록 공간이 있는 곳으로 옮겨 다시 심어주었다. 당근도 뾰족뾰족 여린 잎을 복슬복슬 올리고 있어 그 아래 세상이 궁금하게 만들고 있다. 조금만 더 참았다 주황색 늘씬한 몸매로 만나보자.
'호박꽃도 꽃이냐?',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냐'라고 호박꽃 흉보고 호박 비하한 사람 모두 나오시라. 호박이 수박보다 예쁘고 호박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려줘야겠다. 별처럼 사방으로 매달려 있는 호박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활짝 핀 꽃이 아름답게 지면서 그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 꽃이 진다고 슬퍼말아야 한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났다. 그러다 문득 밭에서 느낀 오늘의 개똥철학 하나 말하자면 나도 한때는 꽃이었는데 다 져가는구나 싶어 질 때 값진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기를.
(열매 만드느라 애쓰는 중)
신발에 흙 닿는 거 싫어하고 캠핑도 불편해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펜션보다는 호텔이나 콘도를 선호하는 사람이었는데 텃밭에서 일하느라 손톱이 새까매지고 신발과 바지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도 기분 좋은 건 왜일까? 나이 들수록 잊혀가는 설렘을 데려와 줘서일까? 아니면 이제 웬만해서는 신기할 것 별로 없는 일상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또 다른 깨달음을 줘서일까? 대답을 하나로 명쾌하게 말할 수 없지만 아무튼 고맙다. 그래! 그게 좋겠다. 고마운 거. 불안함의 '두근두근'을 설레는 '두근두근'으로 바꿔줘서 고맙다.
마지막 사진은 영화로 치자면 쿠키영상 같은 것이다. 밭에서 만난 벌레들이다. 예전 같으면 징그럽다고 뒷걸음질 쳤을 텐데 밭식구로 받아들이니 모두가 귀하다.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