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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석 Feb 18. 2018

순전히, 순천

첫사랑과 순천

그녀가 살던 곳     


 첫사랑을 만나러 가고 있다.     


 그녀가 살던 곳은 순천이었다. 첫 사랑이자 첫사랑이었다.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부모님께 처음으로 내민 반항이었다. 배낭만 메고 새벽에 나서는 용기의 시작이었다. 기차를 타든 버스를 타든 4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 떨어져 있을 때엔 그 간격에 절망하다가도, 차에 오르면 오히려 적당한 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가 닿지 않게 멀리 숨겨둔 내 사람 같아서.      




 마지막 차를 타고 순천에 이르면 새벽이 온다. 푸르스름한 안개와 주홍빛 가로등은 순천이라는 색채로 만난다. 길 끝 가로등은 남은 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가로등 아래에, 네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나는 달려가서 너를 안았다. 긴 시간을 달려 이곳에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간동안 기다려 주어 고맙다는 마음으로. 와락.      


 그녀가 살던 집은 대학교 후문에서 이어지는 길 위에 있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길에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깔리는, 밤에 더 환한 동네였다. 올라가는 길에 초등학교와 꽃집이 하나씩 있다. 집 뒤 대나무 숲이 자주 수런댔다. 이따금 창가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소녀가 그림자로 나타났다. 초봄에 붉은 매화가 피어 매곡동이라 불리는 동네였다. 적당한 높이에 있어 동천과 옆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자전거로 밟은 그 밤 골목길을 몸으로 기억한다.       




 그녀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준 곳이 동천이었다. 동천은 아주 평범한 개천이지만 딱 이곳에 필요한 모습으로 흘러 순천만에 이른다. 동천 옆에는 기찻길이 있어 남도를 지나는 사람들도 물과 함께 흘렀다. 밤이 되면 몇 안 되는 건물의 불빛이 떠올랐다. 떠오른 빛을 징검다리 삼아 동천을 건너다니곤 했다. 동천 곳곳에 우리의 추억을 심어두고, 달마다 다르게 피어나는 계절의 꽃들을 사랑했다.     


 처음 네가 동천으로 가자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세계 여행을 시켜주겠다고 했지. 산책로 벽화에 펼쳐진 지도와 국기를 가리키며, 가보고 싶은 나라들을 짚어 보라고 할 때. 별거 아닌 농담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정말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너는 이 물의 흐름처럼 딱 이곳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남도를 닮은 채 살아가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밖으로 나서고픈 꿈을 가진 소녀였다.       




이야기하지 못한 풍경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동천도 순천만에서 바다와 만난다. 철새들이 스치는 구름엔 하늘길이 열리고, 바람이 내달리며 갈대 사이에 골목이 생겨나고 사라졌다. 가장 바닥에서는 작은 생물들이 갯벌 위를 움직이며 낸 자국들이 쌓여 큰 길이 된다. 수많은 길이 교차하는 한복판을 우린 걸어가고 있었다. 그중에 사람을 위해 난 산책로는 하나밖에 없어서, 그날처럼 우리는 평생 한 길로만 걸어갈 것 같았다.       


 순천만을 찾는 여행객은 대부분 전망대에 오른다. 손끝을 간질이는 갈대꽃과 다르게 산 위에서 보는 갈대밭은 흔들리지 않는다. 깎아 놓은 듯 동그란 모양을 유지한 채 거센 조류와 바람을 견뎌낸다. 이 풍경을 볼 때마다 내게 찾아오는 의문과 후회가 있다. 너와 나는 왜 한 번도 이 풍경을 함께 본 적이 없는 걸까. 라는 질문과 아쉬움이다. 각자는 순천만의 전경, 그리고 노을을 기억하지만 전망대에 같이 오른 날은 없었다.      



 우리는 갈대의 흔들림을 감각하는 데에만 익숙했다. 높이 올라 먼 풍경을 보는 방식엔 서툴렀고, 굳이 그 이야기도 꺼내려 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다가올 내일은 그저 설레는 여행이었으나 종착지는 어디일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각자는 끝을 그리고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는 데엔 두 사람 모두 서툴렀다.      


 순천만의 갈대는 바람에 흔들리고 나면 제자리로 돌아온다. 갈대 사이에 숨은 철새들도 돌아가는 계절이 있다. 우리도 서로를 찾아 정신없이 흔들리고 나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먼저 중심을 찾은 사람은 그녀였다. 그녀는 멈춰있고, 나 홀로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순천에 인공정원이 생기며 큰 축제가 열릴 무렵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날, 혹은 평소와 조금 다른 하루를 눈치 챈 어느 날, 우리는 물가에서 술을 나누어 마셨다. 발간 얼굴로 터미널에 이르렀다. 그녀가 여행을 멈추자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에도 장난을 치며 그녀의 손을 끌었다. 그녀는 이곳에 남아있고 싶다 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농담을 던지며 말을 돌렸다. 그녀는 이 이상 더 멀리, 도시로는 갈 수 없다고, 울면서 돌아섰다. 모든 연락이 끊겼다. 첫사랑에게 밴 남도는 내가 그녀에게 반한 이유였다. 동시에 그것은 그녀가 여행을 멈추는 이유가 되었다. 그 사람에겐 이곳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가끔은 나의 중심도 그곳에 두고 오진 않았는지, 아픈 한숨을 쉰다.   




여전한 얼굴순전한 마음     


 그녀에게 반한 순간을 기억한다. 친구들과 순천의 어느 사찰로 가는 길에 우연히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달리면 머리칼에서 비누냄새가 났다. 어색한 분위기 탓에 그녀는 창문 밖만 바라봤고, 그 탓에 그녀의 눈동자는 갈색으로 반짝였다.  웃음이 잦은 만큼 눈물은 더 많은 사람이겠지. 짐작했다. 이중에 하나라도 빠졌다면, 그녀에게 반한 사건은 없었을지도. 혹은 미뤄졌을지도 모른다.      


 그날과 마찬가지로 버스를 타고 숲으로 가던 날이 있었다. 너에게 처음 반했던 날과 비슷한 느낌이라며, 그 순간 받은 기시감을 털어놓았다. 그날은 여전하고 내 마음은 순전했다.      


 첫사랑은 매번 순천의 가장 깊은 곳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는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 들어가니 숲이 나왔고, 우리는 숲에서 조금 더 걸어 선암사를 찾아갔다. 누구의 소유라 말하기 어려운 고요함과 소박함이 묻어나는 길이었다. 숲과 사찰 사이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 선을 뚜렷이 긋기 어려웠던 걸까. 선암사에 대한 권리는 셋으로 나누어졌고 사찰은 다툼 속에 놓여있다.      




 누구의 것이라 말하기 어려운 탓에 건물에도 쉽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우리가 보는 선암사는 처음 지어지던 시절의 형태에 매우 가깝다. 단청은 색이 바라고 목재의 결은 가장 딱딱한 부분을 남긴 채 사그라졌다. 화려한 색은 세월에 씻겼다. 시간은 연약한 껍질은 파먹고 단단한 골격만을 뱉어뒀다. 이 모습이야말로 원형에 근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속에서 온전하게 한 사람을 건져내는 마음처럼.      


 그녀와의 여행이 끝난 후 한동안 순천을 찾지 못했다. 개인의 소유가 아닌, 우리의 시간이었다는 이유로, 그 시절은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서로를 포기했다는 원망 역시 주인이 따로 없었기에 구차한 감정들을 덧대는 일도 없었다. 어설픈 그리움과 감정이 잦아든 지금,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 마음은 무엇일지 들여다본다.     




 첫사랑은 특별하다. 단지 잊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삶의 어디쯤에서 다가온 사람이든 잊을 수 있는 사랑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첫사랑이 특별한 이유는 앞으로 모든 사랑의 기준과 규칙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시작, 외로움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내게는 글을 쓰는 이유가 되었고, 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되었다. 그녀와 걷지 않았던 길을 찾아 헤매야 했고, 감정을 덜어낼 곳을 찾아 글에 이르렀다. 많은 것이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그녀는 그 집에 살지 않는다. 각자의 반경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다. 간혹 들려오는 소식에 귀 기울이며. 그날에 던지는 의문과 감정들이 쌓여갔다. 편지가 갔고, 답장이 왔다. 그리고 서로 여행이 겹치는 날이 왔다. 멈췄던 우리의 여행이 오늘 하루 다시 이어진다. 30분 뒤 네가 이곳으로 온다. 초침에도 예민해졌다.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똑같은 박자에 박힌 똑같은 목소리. 내가 앉아있는 카페 건너편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횡단보도 건너편, 빨간 신호등 아래에 네가 서있다.     


 너를 본 나의 마음은 아직도 순전하다.   

 

 초록불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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