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음식의 위로
올여름은 유난히 몸이 힘든 해였다. 봄에 위궤양으로 음식을 제대로 못 먹어 골골한 상태에서 지독한 여름 감기로 한 달을 고생했다. 몸이 조금 나아져서 운동하러 갔다가 이번에는 허리에 무리가 와서 또 일주일을 어렵게 버텼다. 아프다는 말도 하기 싫어 일상은 꾸역꾸역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자연과 음식으로 위로받고 나니 몸과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얼마 전, 뉴욕 켓스킬이란 깊은 산속에 살고 계신 분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북클럽 전체 디렉터를 하고 계신 분인데 9월 학기 시작을 앞두고 스텝들을 독려하는 자리였다. 처음엔 "점심 먹으러 오라"는 말씀에 다들 내켜 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왕복 6시간이 걸리는 먼 곳이어서 당일로 다녀오기엔 무리였기 때문이다. 나부터도 호의는 고맙지만, 하루를 온통 비워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한참 고민하다 집으로 초청해 주신 분의 성의를 생각해서 가기로 하고 오전 8시에 집을 나섰다.
우리가 방문한 켓스킬은 뉴욕시티에서 북쪽으로 약 160km 떨어진 곳에 있는 미국 동부의 아름다운 산악지대이다.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호수, 산들이 나지막하게 둘러싸여 있어서 등산, 캠핑, 낚시를 즐기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일반적으로 휴가를 가서 며칠 동안 머물며 여유 있게 놀다 오는 곳이지만, 우린 단 하루 일정으로 다녀오게 됐다.
어쨌든 우린 승용차 2대에 나눠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무려 3시간 만에 켓스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숲속에 있는 집은 평온했다. 뭐랄까! 예쁘게 꾸며놓은 감성적인 곳이라기보단, 소박하고 자연 친화적인 곳이었다. 개와 닭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오래전에 티브이에서나 본 듯한 산촌 같았다. 조금 걸어서 집으로 들어서자, 땀을 뻘뻘 흘리며 안주인이 대형 가마솥에 백숙을 삶고 계셨다.
우린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후 곧바로 점심을 먹었다. 안주인이 요리 솜씨가 뛰어난 것은 이미 알았지만, 음식 하나하나에 그녀의 정성이 녹아 있었다. 비트와 케일을 넣어 만든 색색이 도토리묵은 플레이팅도 예쁘고 아주 감칠맛이 났다. 텃밭야채로 만든 각종 나물과 전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해주던 맛과 똑같아 향수를 자아냈다. 전복과 각종 약재를 넣어 만든 백숙에 다들 감탄을 연발하며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식사했다.
식사를 즐기면서 대화도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주인 부부는 한인들을 위해 이 공간을 마련했다고 한다. 타국 생활에 지치거나 외로운 교포들을 보며 따뜻한 한 끼 밥상을 차려주고 싶었단다. 식사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힘을 내도록 용기를 주고 싶은 게 부부의 오랜 꿈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수년 전에 나무만 둘러싸인 이곳을 작은 천국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하나씩 완성해서 지금에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2년 후에 아내 되는 분이 은퇴하면 본격적으로 힐링센터를 시작할 거란 계획도 나눠 주셨다.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우린 소화하기 위해 집주변을 산책했다. 들꽃이 얼마나 예쁘게 피었는지 나는 일행과 떨어져 야생화를 구경하고 안주인에게 드릴 꽃다발을 만들었다. 가지고 간 토트백에는 버리려고 모아놓은 꽃들을 가득 담았다. 들꽃이 다양하고 예뻐서 집에서 가까운 곳이면 자주 방문하고 싶단 생각을 했다. 한쪽을 빌려서 야생화 꽃밭을 만들면 좋겠다는 상상의 나래도 펼치는 것만도 뜻밖의 힐링이었다.
몇 년 전에 상영한 "리틀 포레스트"란 영화가 있다. 임순례 감독과 김태리, 류준열 배우가 주연했는데, 주인공 혜원이 공무원 시험에 떨어진 후 빈 고향 집으로 돌아와 어린 시절에 엄마가 해준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힐링하는 잔잔한 영화다. 주인공은 음식을 하며 집을 떠난 엄마를 생각하고, 친구들과 음식을 나누며 젊은 청춘의 고단함을 위로받는다. 자연과 음식을 통해 인생의 소중한 순간과 가치를 되돌아보는 여운이 남는 영화였다.
일상의 소소한 행복 중 하나는 음식으로 힐링하는 것이다. 음식을 나누며 부모님을 떠올리고, 좋은 사람과 함께 했던 소중한 기억을 회상하기도 한다. 향토색 짙은 음식을 나누며 우리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렸다고나 할까? 따뜻한 음식을 함께 먹으니, 마음마저 훈훈해지고, 정성스러운 상차림은 후한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음식 안에 타인을 위한 사랑과 배려까지 함께 느껴져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마지못해 간다는 불편한 생각으로 집을 나섰지만, 돌아오는 길은 따스하고 감사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들판에 가득했던 들꽃이 생각나고 따뜻했던 음식이 생각나 새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