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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Apr 05. 2023

떠나는 이야기 #5

마지막 입원

점점 주무시는 시간이 길어지고, 반응 속도가 느려지고, 식사량이 거의 없을 무렵이 되자 엄마는 아빠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재입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쉬운 문제는 아니었어요. 환자 본인이 병원을 거부했고, 연명치료를 고통스러워하는데, 가족의 결단으로 입원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하여 매일같이 갈팡질팡하는 엄마 대신 주무시는 아빠를 깨워 가만히 말씀드렸습니다.

아빠. 우리 다시 병원으로 갈 거예요. 다시 집에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남은 시간이 더 길어질 수도 있는데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려서 그게 하루라도 줄어든다면 도저히 슬퍼서 못 견딜 것 같아요. 병원이 싫으면 나한테 화내세요. 이것밖에 방법이 없어서 미안해요.

다시 가요 아빠.


우여곡절 끝에 진료 예약만 잡혀있을 뿐 입원실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병원으로 향하고, 근 10년 이상을 통원했던 주치의를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그는 우리가 퇴원하던 날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는지, 비록 휠체어 신세지만 진료를 보러 왔다는 사실 자체에 조금 놀란 눈치였습니다. 그날 의사가 어떤 말을 했었는지는 놀라울 정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마 실제로 크게 도움 되는 말은 없었고, 어차피 별다른 조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진료 대기실에서 휠체어 등받이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던 아빠와, 그 뒤에 서서 웅크리듯 아빠의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엄마의 모습입니다.


대기번호가 딩동, 딩동 하는 내내 변화 없이 눈을 감고 있던 아빠의 얼굴에 비친 피로감과, 그런 아빠를 끌어안은 채 두려움과 걱정, 슬픔. 안타까움, 그리고 약간의 분노감이 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 말없이 서 있던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일생을 함께한 배우자가 나날이 사그라드는 모습을 지켜본다는 것은 저로서는 아직 상상할 수가 없는 감정이었습니다. 대체 어떤 마음으로 버텨야 하는 걸까요?


좋았던 시절을 떠올려야 버티기가 쉬울까요? 풋풋한 처녀총각 시절, 자녀들을 키우며 나날이 커가는 모습을 보고 재롱에 웃던 시절, 함께했던 해외여행에서 바라본 노을, 처음 받은 월급으로 사 온 자식들의 선물, 첫 손자 같은 걸 떠올려야 버텨지는 걸까요?

아니면 차라리 함께 쌓은 고통의 힘으로 버티는 게 나을까요? 제일 지독했던 부부싸움이나, 사업이 힘들 때 서로에게 낸 상처, 처음 병을 진단받던 날 무너졌던 마음. 여러 번 다쳐 단단해진 마음이 있어야 버텨지는 거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뭐든 상관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떤 슬픔은 절대로 버텨지지 않으니까요. 

다만 저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겠다고.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인생의 슬픔으로 남아 살아 있는 동안 계속 되뇌게 되겠다고, 그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진료를 마치고 당장 빈 병실이 없었기에 입원 대기만 걸어 두고 도로 집에 갈 길이 막막하던 순간, 아빠는 화장실에서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졌습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아빠의 눈빛에서는 왜 자신이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과 당혹감이 역력했습니다. 평소엔 화장실에 있는 줄도 몰랐던 비상버튼을 눌러 직원들이 달려왔고, 급한 대로 엄마가 아빠를 모시고 응급실에 입원했습니다. 병원 옆 편의점에서 밤을 보내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나른 후, 어차피 보호자는 1명밖엔 함께 들어갈 수 없어 터덜거리며 병원 앞 보도블록에 주저앉았던 기억이 납니다.


날은 여름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화창하게 꽃향기가 나는 날이었어요.

응급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아빠는 원래 다니던 곳과 연계된 협력병원으로 전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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