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빵을 먹었다. 마지막으로 빵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뭇하여 스마트폰 앨범을 뒤적여 보고 나서야 작년 6월 즈음이란 걸 알았다. 정확히는 1년 2개월 만이구나. 빵 없으면 못 사는 빵순이는 아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빵집에 꼭 들를 만큼 빵을 제법 좋아했는데,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있구나 싶다.
세상에, 빵을 1년에 한 번꼴로 먹는다고?
내가 이 사실을 스스로도 믿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1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 동안 빵을 먹고 싶어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먹은 빵도 정말로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가족들이 냉장고에 방치한 빵이 아까워서 꺼내 먹은 것이었다. 애초에 1년이란 시간을 참을 만큼 대단한 인내심과 자제력이란 내게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비단 빵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밀가루가 들어간 모든 음식을 즐겨 먹지 않게 되었다. 짜장면, 피자를 먹은 지도 2년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먹은 밀가루 음식은 7개월 전 먹었던 인스턴트 라면이다.
남들은 밀가루 음식을 억지로 끊으려고 기를 쓰기도 하는데, 대체 내 몸에 무슨 변화가 생겼길래 이토록 평온한 걸까?
2년 전 건강에 이상이 생겨 밀가루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따금 빵이 먹고 싶을 땐 현미 식빵이나 쌀 식빵, 혹은 통밀 빵을 사 먹었고, 면 요리가 먹고 싶을 땐 통밀 국수나 현미 국수로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드문 일에 속했고, 시간이 지나며 빵이나 면 요리를 찾는 주기가 더욱 길어졌다. 그래도 잊을 만하면 몇 개월에 한 번씩은 빵과 라면이 생각나곤 했는데 한참을 감감무소식이었다. 다른 음식은 몰라도, 몸이 빵과 라면을 달라고 아우성칠 때도 됐는데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건가? 신기했다.
밀가루 음식을 억지로 참지도 않고 자연스레 멀리할 수 있는 까닭을 새롭게 바꾼 식습관에서 찾았다. 핵심은 지나치게 가공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음식을 먹는 것. 비슷한 성질의 것들은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운 음식을 먹다 보면 자연스러운 음식을 찾게 되고, 자극적인 음식을 먹다 보면 더 자극적인 음식을 찾게 된다. 우리의 입맛은 너무도 쉽게 맛에 길들여진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에는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 많은가. 맵고 짜고 달고 기름진 음식은 가히 중독적이다. 자극적인 음식을 멀리하니 음식에 쉽게 현혹되거나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의 주도권을 되찾아 온 셈이다.
건강 상의 여러 문제도 개선되었다. 밀가루 음식은 대체로 소화가 잘되지 않는다. 밀가루로 만든 가공식품, 배달 음식, 간식들을 먹지 않는 대신 통곡물, 채소와 과일들로 식단을 꾸리면서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으로 좋지 않았던 소화 기능이 차츰 회복되었다. 밀가루에 반응하는 알레르기 체질인지는 정확한 검사를 해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들을 먹지 않은 후로 평생을 달고 살아온 비염도 사라졌다. 비단 밀가루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애써 밀가루 음식을 찾아 먹을 이유가 더는 없어졌다.
사실 밀가루가 나쁜 것은 아니다. 밀가루가 건강에 해로운가를 따진다면, 문제는 밀의 단순당과 밀가루 음식에 들어간 첨가물에 있다. 빵, 라면 등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는 식품에 들어간 기름과 설탕, 각종 화학 첨가물이 해로운 것이다. 체질 때문에 밀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밀도 건강하게 섭취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밀을 섭취할 땐 통밀가루로 만든 통밀전, 통밀 국수로 만든 콩국수, 통밀가루로 만든 통밀빵처럼 이왕이면 통곡물의 형태로 소비하려고 하는 편이다.
건강 상의 목적 외에 밀가루 음식을 자제하는 또 다른 이유가 한 가지 있다. 밀이 자연스럽고 가까운 음식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국은 수입 밀 의존도가 높다. 우리 밀 자급률은 1%밖에 되지 않는다(2021년 기준 1.1%). ‘이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을 먹는다’는 가치관에 따라 밀을 주식으로 하기에는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어려움이 따른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노력이라면, 밀을 소비할 때 일반 외식이나 가공식품보다는 국산 밀가루로 직접 요리를 만들어 먹거나 우리 밀을 사용하는 음식점이나 빵집을 이용하는 것이다.
감히 밀가루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든다. 이건 배부른 소리다. 그 밖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이 땅에 감사하다. 밀가루 음식은 특별한 날 먹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 음식이 많은데" 그래서 그 음식들을 못 먹어서 손해 본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 맛을 모르는 게 손해일까? 먹는 게 손해일까, 먹지 않는 게 손해일까? 지나침은 언제나 독이 된다는 걸 기억하자.
건강한 식습관의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몸에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이 아니라 해로운 음식을 줄이는 것이다. '아는 것은 깨닫는 것만 못하고, 깨닫는 것은 실천하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몸이 망가져서야 비로소 심각성을 깨닫고 식습관을 바로잡았다. 알면서도 행하는 어리석음을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일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건 그것이 나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일만 못하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통밀전 만들기
밀가루 없는 콩국수 만들기
라면 없이 살기
내가 없이도 살 수 있는 것 45. 밀가루
- 없어도 괜찮은 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