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과 희망은 한 끗차이

등록금과 약속

by 힐링아지매


"오늘은 5시까지 OOO식당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침마다 직업소개소에서 전화가 온다. 오후에 아르바이트 나갈 곳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이다. 낮시간에 영업 활동을 끝내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설거지와 서빙등 도우미로 일 한다.

시급 3천 원, 루 5,6시간씩 일주일에 서 너번씩 아르바이트를 한다.


4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영업은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겉돌며 헤맨다. 그 결과 성과가 없고 수입이 적어지면서 먹고사는 일 자체가 위태롭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은 보험 영업에 집중하면서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자꾸 활동을 안 할 핑곗거리만 늘어난다.


소개를 받지 못해서... 만날 사람이 없어서... 술자리를 함께 하자고 하거나 자기랑 데이트 한 번 하자고 하는 말을 듣는 것 자체가 싫어서... 고객과의 기싸움을 이겨내지 못해서... 등등 많은 이유들을 대면서 자꾸 보험과 멀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빌어먹을 성실함으로 출근은 잘하고 있지만 활동은 개점휴업 상태가 된 지 오래다. 궁여지책으로 직업소개소를 찾아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이다.


쉴 새 없이 쌓이는 빈 그릇 씻고 닦고 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텅 비어진다.(199년 당시에는 큰 식당이라도 식기세척기가 거의 없었고 전부 손으로 다 했다) 리가 끊어질 듯하고 종아리는 천근만근 무거워지지만 억지 미소를 짓거나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되니 좋다.


그렇게 서너 번씩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서 형편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 저녁 한 끼 식사를 해결하고 일당을 현금으로 받면서 하루를 살아내는 작은 숨구멍은 되어 주었다.


모든 것에 흥미를 잃었고 열정이 빠진 나의 에너지를 고객도 느낄 것이다. 나의 말과 행동에 힘이 실리지 않다는 것을...


어느 영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보험 영업 역시 매달 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준히 사람을 만나면서 로운 고객을 만드는 작업을 매번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그로써 계약이 발생하고 그에 따른 수당을 받아야 조금 더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에 자신이 없어지면서 신규 계약이 발생하지 않으면서 수입은 점점 줄어들고 음만 동동거릴 뿐 따라주지 않는 현실에 점점 무기력 해지고 있었다.


와중에 큰 아이가 고3 여름 방학을 맞으며 느닷없이 예체능계로 진학하겠다고 한다. 고1 때부터 하던 밴드 동아리에서 기타를 치면서 취미로 하는 것이라고 는데 갑자기 실용음악으로 진로를 바꾸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아이는 많은 고민 끝에 결정을 하고 나에게는 통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큰 아이의 성향으로 봐서는 어떤 설득도 그 아이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막하다, 내가 해 줄 것도 없고 조금 더 생각해 보자고 말을 하고는 있지만 이미 내 말에는 힘이 없다.

아들의 선택을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주일만 더 고민해 보고 그때 다시 결정하자고 했지만 그건 순전히 혼란스러운 내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일 뿐이었다. 결국 아들은 예체능계 진학을 결정하고 여름 방학부터 실기를 준비했다.


눈을 뜨자마자 악기를 잡았고 손가락에 피가 나고 벗겨지고 굳은살이 박힐 때까지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들의 간절함과 절심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비 시간이 짧은 탓인지 원하는 학교는 가지 하고 등록금이 국공립의 3배가 되는 사립 학에 합격을 했다.


참 열심히 성실하았다. 아니 성실하게만 살았다. 목표도 없고 전략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냥 성실하게만...

그리고 이제 나에게 '남편을 먼저 보내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이야 생기겠어' 하는 아주 안일한 무책임함으로 책임을 다하며 산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 안일함과 무능함과 무책임의 결과는 바로 아들의 등록금이었다. 아이들에게 입학 등록금은 엄마가 해 줄 거니까 그다음 학비나 용돈은 전부 네가 알아서 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정작 나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발등에 불은 떨어졌고 걱정 말라고 큰소리친 만큼 어떻게든지 책임을 져야 한다.


납부기일이 다가오고 적은 인맥을 총동원해서 사방팔방 부탁을 해보지만 돈을 빌려 주겠다는 사람이 없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누구라도 선뜻 빌려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동냥은 못 주더라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을 들어 봤을 것이다. 구보다 나를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았던 사람이 기어이 나의 마지막 남은 쪽박마저 깨버렸다. 믿고 의지 했던 마음만큼 더 서운하고 서러워 가슴을 치고 울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처럼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준다. ‘5개월 뒤에 써야 하는 돈이 있는데 그거라도 빌려 줄까요’ 라며 당신이 써야 할 때 꼭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돈 이야기를 꺼낼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마음을 내어준 덕분에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이제 5개월 동안 그 큰돈을 갚을 궁리를 해야 한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잠자는 시간을 줄는 방법뿐이었다.

아침엔 9시까지 보험회사에 출근, 오후 5~10시 식당 설거지나 홀 서빙을 마치고 밤 9시에는 유흥업소로 출근, 새벽 2,3시 퇴근, 그렇게 하루 3,4시간으로 잠을 줄인 지 3개월이 되어간다.


갑자기 바뀐 생활에 몸이 지쳐가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아우성을 쳐대지만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었다. 5개월만 견디면 그 돈을 갚을 수 있기에 무조건 그 기간 동안은 참아야 한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기에 많이 서툴렀고 유흥업소에서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불편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 불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불법적인 일만 아니라면 더한 일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부족한 잠으로 인해 에 활동을 하면서 짧은 신호대기 에도 눈꺼풀이 내려왔고 차의 경적소리에 놀라 액셀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가고 핸들은 벽을 향해 꺾이고 고가도로 난간 끝으로 달리는 등 머리털이 곤두서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내리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수시로 위가 뒤틀리며 경련이 일어나고 화장실에 갈 때 빨간 생피가 쏟아졌다. 아무리 그래도 5개월은 버텨야 약속을 지킬 수가 있으니 멈출 수가 없다. 이제 2개월만 더 버티면 된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 밤에 몇 번씩 결근을 하면서 결국 한 달을 넘기고 6개월 만에 갚았다.(그것마저 이해를 해주신 그분에게 지금도 감사하다)


잠을 줄이고 피 X을 싸며 번 돈은 빚을 갚고 조금 남은 돈은 혈소판 치료를 하면서 병원비로 고스란히 다 나갔다.

당시 나를 진료해 주시는 선생님은 나의 전후 사정을 모르시니 '돈도 좋지만 당신 이러다 죽는데이' 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1주일마다 혈소판 수치가 뚝뚝 떨어지면서 최악의 경우 백혈병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다행히 밤 일을 그만두고 정상적으로 잠을 자면서 몸에게 휴식을 주니 혈소판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아팠던 시절이다. 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이 격언 대로 모든 상황이 이제 절망이라고 말할 때 모두가 나의 간절함을 외면할 때 힘이 되어 주신 도반과 5개월 정도밖에 일을 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면서도 일을 할 수 있게 해 준 유흥업소의 사장님은(지인의 지인이었다) 기꺼이 기회를 주고 도움을 준 고마운 인연이다.


간절함으로 목마른 사람에게 한 모금의 물은 갈증만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생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절망과 희망은 따로 있지 않다. 절망으로 무너지려 할 때 누군가 전해 주는 작은 희망의 불씨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절망의 끝에는 언제나 희망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시급 1만 원이 넘는다.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기 전까지 가끔 홀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주변에서는 '왜?'라는 시선과 '아직도 그렇게 힘들어?' 하는 물음의 눈짓을 주면서 그들 마음대로 불쌍하고 안타깝다고 지만 한 달에 두세 번씩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서 좋았다.


여전히 전략적이거나 치밀하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아온 것을 보면 스스로 대견할 따름이다. 이젠 나의 가장 큰 무기인(?) 성실함으로 건강이 허락하는 순간까지 꾸준하게 글을 쓰면서 노년의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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