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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니빈 Jan 26. 2024

나는 너를 돕고, 너는 나를 돕는다 - 2부

동료 지원(Peer-support) 제도 - 트라우마에 반창고 붙이기

4. 동료 지원, 어떻게 하나?


1부에선 동료 지원 제도가 왜 필요한지, 또 동료 지원 제도를 통해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리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동료 지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다트센터에서는 아래와 같은 5가지 단계를 거치면 된다고 했다.


첫째, 시작 단계 (Greetings)

시작이 반이라는 뻔한 말이 있다. 뻔하다는 건 그만큼 너무 중요해서 많이 강조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 가벼운 인사를 나누며 보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다. 동료가 먼저 도움을 요청했든, 동료 지원가가 먼저 다가갔든 처음부터 무조건 심각하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 그저 동료 지원가가 자신의 역할을 명확하게 말해주면 된다. "나는 동료 지원가 교육을 받았어. 내가 혹시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라고 묻거나,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것 같아. 혹시 나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라며 가벼운 제안을 하는 것도 좋다. 각자가 처한 문화권 내에서 통용되는 수준으로 접근하면 된다. 가벼운 운동이나 문화생활을 함께 하거나, 주변 맛집에 방문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단, 이때 중요한 것은 동료가 스스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거다. 앞으로 당신과 나누는 대화가 어떤 외부 인물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을 지키겠다고 알려주어야 한다. 가벼운 대화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동료에게 당신이 하는 이야기는 '안전지대'에 있음을 상키시켜 주는 것이다. 실제 호주 현지 다트 센터에서 받았던 연수에서도 이런 과정이 여러 차례 강조됐다. 객관적인 지식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과 나누되, 각 참가자들이 풀어 놓은 사적인 이야기는 절대 외부에 공유하지 않기로 다같이 약속했었다. 이와 같은 '안전지대' 보장 약속은 동료가 좀 더 편한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둘째, 알려주기 (Inform)

이 단계에서는 동료 지원가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을 나누게 된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당사자가 구할 수 있는 여러 종류의 도움을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동료가 겪는 다양한 정신적, 신체적 반응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슬프게도 우리 사회는 아직 정신건강의 이상을 호소하는 것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동료에게 "언론인으로(물론 다른 직군도 마찬가지) 일을 하면, 트라우마를 겪는 경우가 굉장히 많대! 지금 네가 겪고 있는 정신적, 신체적 이상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과정이야."라고 이야기를 전해 주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는 큰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아래와 같은 내용들로 이어가면 된다.


"트라우마 증상을 겪는 사람들 대부분이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잘 회복하고, 금방 좋아진대."

"네 곁에는 너의 회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정말 많아. 그러니 너도 금방 회복할 수 있을거야!"


정리하면 당사자가 이제는 더 이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참혹하고 위험한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고,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점차 좋아질 것이라고 확인시켜 주는 차원이다. 여기에 동료 지원가가 적정 수준에서 공유해줄 수 있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 주면 더욱 좋다. 다만 1부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초점과 방향성 자체가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넘어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셋째, 경청하기 (Listen)

동료가 어느 정도 자신이 안전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면, 이제부터는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면 된다.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과 그때 동료가 경험한 감정, 지금의 마음가짐 등을 물어보는 것이다. 동료는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털어놓는 것 만으로도 회복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이 갖는 슬픔과 애도의 감정을 마음 놓고 꺼내놓도록 하는 것이다. 이 때 동료 지원가의 중요한 역할은 이야기를 들으며 적정한 수준의 공감을 표하되, 과도한 개입이나 동정은 하지 않는 것이다. 동료가 털어 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들이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지, 또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무엇인지 되새기며 듣는다. 충고나 조언처럼 느껴질 수 있는 말을 하거나 "이런 부분은 왜 말하지 않아?"와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은 공격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냥 들어주면 된다'고 하지만, 사실 타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때문에 나의 사적인 판단과 충고는 최대한 뒤로 미뤄놓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대화 도중 때로는 침묵이 찾아올 수 있다. 다트 센터에선 침묵도 괜찮다고 했다. 침묵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대화가 흘러가는 대로 두면서 동료가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넷째, 연대 (Connect)

동료의 곁에 누가 있는지 상기시켜 주는 단계다. 트라우마를 겪으며 동료가 잃어버린 안전감과 유대의 감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의 곁에 있는 친구들, 가족들, 그의 직업과 업무, 나아가 그 자신과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주변인과 연결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는 동료가 스스로 주체적인 결정권을 갖는다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보다 전문적인 의학적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에 대해서도 안내할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앞서 1부에서 소개했던 트라우마 극복의 방법, '보호의 삼각지대(triangle of protection)'에 대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마무리

경청 단계에서 들은 내용을 간단하게 되짚어준다. "오늘 네가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간단히 정리하면서, 동시에 이와 같은 동료 지원과 지지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임을 알려 희망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되도록 스트레스를 받거나 트라우마를 다시 유발할 수 있는 환경에 바로 복귀하지 않는 것이다.


다트 센터에서는 이와 같은 5가지 단계를 소개한 뒤, 참가자들을 두 명씩 나누어 실제 동료 지원 상담을 하도록 했다. 교육을 받을 땐 "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1:1로 다른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려니 쉽지 않았다. 열흘 동안 같이 연수를 받으며 많이 친해지고, 익숙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막상 내가 동료 지원가로 나선 상황이라고 생각하니 뻘쭘하고 어색했다. 다섯가지 단계별로 중요한 키워드를 되새기며 동료 지원가로서의 경험을 몇 차례 반복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5. 서로 돕기엔 냉혹한 우리 현실


호주엔 동료 지원 제도가 잘 자리잡은 사례가 꽤 많다. 그런만큼 올바른 동료 지원의 절차도 위에 소개한 것처럼 나름의 '바이블'처럼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걸 우리나라 현실, 특히 언론인들의 환경에 바로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대다수 연수 참가자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매일 매일 정해진 마감 시간에 맞춰, 그것도 한정된 인력으로 정해진 아웃풋을 내야 하는 조직. 사실 각자 자기 마음을 돌보기도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동료의 지친 마음까지 굽어 살필 여유가 있을까.


대체로 마초적이고 거친 언론사 문화도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언론사에 입사하면 소위 '도제식'이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 취재는 어떻게 하면 되는지, 기사는 어떻게 쓰는지 하나하나 가르쳐 주지 않는다. 덜렁 현장에 던져저 직접 부딪히고 깨지고, 또 선배들에게 혼나면서 배운다. '마음이 힘들다'는 호소가 '일하기 싫다는 거냐'는 비아냥과 핀잔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물론 "여기서 제일 센 놈이 살아남는다!"는, 이런 방식의 교육이 때로는 언론인 개개인에게 큰 배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와중 누군가의 마음에는 병이 들 위험성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런 거친(?) 문화 속, 동료 지원 제도와 같은 시스템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지금도 많은 정신건강 전문의들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관련 학술 대회나 세미나도 틈틈이 열리고 있다. 호주 현지 연수 당시, 참가자들 역시 언론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한 제도가 있다면 무엇일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단일 회사에서 시행하기 어렵다면, 방송기자연합회나 기자협회 차원으로 제도 시행 주체를 넓히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겠다는 의견도 나왔다. 이처럼 앞으로도 동료 지원 제도를 ABC 방송국처럼 잘 운영하려면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지에 대해서 앞으로도 논의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지금까지 동료 지원 제도에 대해 거창하고 자세하게, 또 구구절절 설명했지만 심플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업무를 마친 뒤 시원한 맥주 한잔 곁들여, 치킨 먹으면서 나누었던 대화 모두가 동료 지원의 일환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방송국 주변 술집들은 전부 기자들이 먹여살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자들은 일 마치고 "한 잔 해야지!"를 좋아한다. 어찌보면 이렇게 서로의 고충을 나누고, 격려하면서 스트레스를 털어내는 과정을 통해 나름 '우리 방식대로' 동료 지원을 실천해 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차원의 소통을 조금만 더 확장하고 다듬는 것이 동료 지원이라면, 생각보다 머지 않은 시점에 우리도 서로가 서로를 돕는 문화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 지원 제도를 구체적으로 담아내는 그릇이 항상 호주의 그것과 똑같아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호주에서도 기관별로 동료 지원 제도는 다양한 형태를 띄고 있다. 연수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동료 지원 제도를 접했는데, 응급 상황에 투입되는 구급 대원들끼리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반려동물을 동료 지원가로 활용했다. 강아지를 키우는 일부 동료 지원가들이 반려견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간단한 훈련을 받게 해, 훌륭한 '동료 지원 강아지'로 키워냈다. 아래 영상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접할 수 있다.

모든 지구인의 시청이 권장되는 귀여운 영상

6. 에필로그


위 사진은 이 글의 커버로도 등록되어 있는 사진이다. 호주 연수를 받을 당시 묵었던 호텔 근처 레스토랑에서 직접 필름 카메라로 찍었다. 리트리버 두 마리가 엉덩이를 맞대고 앉아서 주인이 밥을 다 먹을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셔터를 눌렀다. 당시엔 그냥 귀엽다는 생각에 찍었는데, 교육 내용을 복기하면서 이 사진이 동료 지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를 돕고, 너는 나를 돕는 것. 힘들고 지칠 때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동료 지원의 출발점이자 핵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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