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er-support, 직역하면 '동료 지원'. 내포하고 있는 의미와 그 가치에 비해 이름이 한없이 딱딱하다. 이 제도를 처음 접한 건 지난 2023년 여름, 호주 멜버른에서 있었던 <재난취재보도와 트라우마과정> 연수를 통해서다. 무더운 여름에 선선한 초겨울 바람이 부는 곳에서의 연수라는 점에 혹해 신청했고, 운 좋게 연수생으로 선발되어 다녀왔다. 배움의 깊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었다. 일반인에 비해 충격적인 사건, 사고와 재난 및 참사를 직접 접하고 가까이서 볼 일이 많은 기자들이 겪을 수 있는 여러 트라우마 증상들을 배웠고, 또 이들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수 당시, 동료 지원 제도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로 소개됐다. 핵심은 정신건강 분야 전문가가 아닌, 동료들끼리 서로의 회복을 돕는다는 거다.대다수 연수 참가자는 당시 배운 내용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으로 이 제도를 꼽았다. 아마 다들 우리나라에서 미처 접하지 못한 시스템이라 새로웠고, 앞으로 우리 사회에도 꼭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동료 지원 제도는 온라인 괴롭힘 뿐만 아니라 각종 재난이나 사건 사고를 겪은 개개인이 전문가나 외부의 도움 없이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동료 지원 제도가 언젠가는 꼭 우리나라에도 자리 잡아 보다 많은 이들의 마음을 보듬고, 눈물을 닦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또 딱딱한 '동료 지원'보다 예쁘고 부드러운 이름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입에 착 붙는, 기억에 남는 이름이 있으면 이 제도 자체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알려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1. 언론인도 트라우마를 겪는다.
동료 지원 제도는 트라우마 극복에 필요한 일종의 응급조치다. 다트 센터 측은 '피가 나는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와도 같다'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료 지원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 전반의 관심이 많아지면서 트라우마라는 개념 자체가 생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트라우마는 잔혹한 사건, 사고나 인명 피해를 야기하는 참사나 재난에 직, 간접적으로 노출된 뒤에 겪는, 우리가 직접 통제하기 힘든 충격적인 경험을 가리킨다.
트라우마는 구체적인 신체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크게 과민, 과소 반응 2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다트 센터에선 과민 반응은 'fight zone', 과소 반응은 'freeze zone'으로 표현한다. 영어 단어에서 느껴지는 뉘앙스와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 과민 반응은 신경계가 작은 자극에도 과도하게 움직여 문제가 생기는 것이고, 반대로 과소 반응은 어떠한 자극에도 신체와 정신이 더디게 움직이는 상태를 가리킨다. 대표적인 과민 반응으로는 분노, 짜증, 패닉 상태, 불면증, 소화불량 등이 있고, 과소 반응으로는 우울감, 저혈압 등이 있다. 적고 보니 오늘날 직장에 다니는 현대인이라면 만성으로 호소하는 증상들이기도 하다. 역시 다 회사와 출근이 문제였어! 나도 간절하게 쉬고 싶다!!
보통 인간의 뇌는 '회복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바닥에 탄성이 있는 탱탱볼을 던지면 쿵 부딪혔다가도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것처럼, 정신적 충격을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여러 선행 연구에 따르면 언론인의 회복 탄력성은 다른 직군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두 가지 가설이 있다. ^애초에 회복 탄력성이 높은 사람들이 기자 시험에 잘 합격한다. ^일을 하다 보면 회복 탄력성이 높아진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 기자로 일해 본 결과, 두 가지 모두 맞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두 번째 가설은 왜인지 조금 슬프게 느껴진다.
왜 슬프냐. 잠시 라떼를 끓여보면... 그러니까 옛날 옛적 주 52시간 근무제 같은 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무렵, 경찰서 2진 기자실(tmi. 2진 기자실이란? 우아하게 앉아서 타이핑 하는 것이 아니라, 2층 침대 혹은 언제 빨았는지 모를 이불을 덮고 막내 기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쪽잠을 자는 공간)에서 하루에 2시간씩만 자면서 선배들에게 혼나던 고통스러운 경험이 회복 탄력성을 갖추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언론인은 일반인에 비해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많이 접하지만 금방 회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렇게 기본적으로 일반인에 비해 회복 탄력성도 높다는데, 왜 언론인의 정신건강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걸까? 역설적으로 회복 탄력성이 높다는 그 '이미지' 때문이다. 물론 세상엔 정말 다양한 수백 명의 기자가 존재하고, 각자가 고유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좋든 싫든 기자라면 보통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을 터. 왠지 부당한 일 당하면 잘 따질 것 같고, 물건 사고 나서 환불 잘할것 같고, 시끄러운 고깃집에서 사장님 잘 부를 것 같고. 기타 등등을 종합하면 '세 보인다'는 거다.
또 일을하다 보면 여러 출입처에서 소위 "나 잘났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말만 그렇고 실제로는 안 잘난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은 정말 잘난 사람들이라 이들과의 대화와 소통에서얕보이거나 우습게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을 강인하고 센 이미지로 칭칭 둘러싸는 경우도 꽤 있다.그러다 보니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꺼내어 풀어놓지 못한다. 그러면 왠지 지는 것 같거든. 하지만 우리 모두는 생각보다 나약한 인간인걸. 결국 이렇게 조용히 마음이 병들게 된다.
게다가 갈수록 각종 범죄 수법들은 더욱 잔혹하고 대담해지고 있으며, 지난 2022년 있었던 이태원 참사처럼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발생하는 대형 사고도 잦아지고 있다. 다트 센터는 이런 점에 착안해, 언론인들이 참혹한 현장에 주로 투입되는 응급대원이나 의료인에 준하는 정도의 트라우마에 노출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보고, 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한 연구를 다방면으로 진행하고 있다. 그 배경엔 언론인이 건강해야 제대로 강자를 감시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한 때 있기는 있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잊고 산 지 오래인,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지구 반대편에서 새삼스레 되새기는 것 같아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2. 그래서 동료 지원 제도, 그게 뭔데?
위에 설명한 트라우마는 'Triangle of Protection', 즉 '보호 삼각지대'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 쉽게 풀어쓰면 나 자신을 보호하는 3축 체계를 구축하는 거다. 이 3축은 1) 내 일의 사명감을 찾는 것, 2) 적당한 신체 활동 하기, 3) 사회적 연대 관계(social connection) 쌓기로 구성되어 있다. 참고로 연수 도중 참가자들은 이런 회복 과정에 어떤 것이 도움이 될지 브레인스토밍하는 활동에 참여했었다. 책 읽기, 여행 가기 등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방법부터 '퇴사', '호주로 이민'과 같이 직장인의 마음을 울리는 다양한 해결 방안이 나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상당히 인상 깊어서 사진을 찍어 놓았다.
연수 참가자들이 직접 써서 모은 다양한 트라우마 회복 방안
동료 지원 제도는 이 중 세 번째 축인 '사회적 연대 관계 쌓기'의 일환이다. 특정인이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을 때, 그와 비슷한 처지와 상황에 있는 동료와 만나 회복에 도움을 받는 것이다. 다트 센터는 동료 지원 제도의 출발점이 "나는 슈퍼맨이 아니다"는 것을 서로에게 알리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슈퍼맨이 아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꿋꿋이 이겨내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아야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힘든 일을 겪으면 마음이 우울하고, 몸이 아픈 건 너무나 당연하다. 나약하지 않아야만 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언론인뿐 아니라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다.
동료 지원 제도는 크게 아래 3가지 특징을 갖는다.
1) 되도록 빨리 한다.
트라우마 등으로 고통을 겪는다면, 가능한 한 빨리 개입해 회복을 돕는 것이 중요하다. '응급 처치'인 셈이다. 고통을 겪는 당사자가 먼저 나서 도움을 청하는 것을 reach-out, 도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것을 reach-in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신체적 고통이 심해지기 전에 빨리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또 트라우마는 반드시 엄청난 참사와 사고를 통해서만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일상 속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자잘한 사건, 사고도 누군가에게는 큰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다. 그러니 '동료 지원가(peer-supporter)'라면 평상시에도 주변에 관심을 갖고 살피다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일이 그렇듯,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거다!
다만 트라우마를 겪는 당사자가 도움을 원치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럴 땐 강요하면 안 된다. 대신 당사자의 부담감을 덜기 위해 보다 캐주얼한 접근을 시도해 볼 수 있다. 다트 센터는 동료 지원이 반드시 진지한 상담이나 도움 제안으로만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잠시 상상해 봤는데, "너는 지금 이런저런 이유로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잠깐 이야기 좀 할까?"라는 제안을 들었다면. 평소 친분이 두텁고 편한 사이의 선, 후배라면 기꺼이 따라나서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한테 왜 이러세요..."라며 오히려 뒷걸음질 칠 수 있다. 이럴 땐 "가볍게 산책이나 하자,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등 가벼운 제안을 던져보는 것이 좋겠다. 도움을 받는 이나, 도움을 주려는 동료 지원가 모두의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기 때문이다.
2)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좋다.
동료 지원가에게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제도가 상용화되려면 동료 지원가들에게 모종의 주의사항과 구체적인 절차 등을 안내하고 교육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동료 지원가가 원활한 소통을 바탕으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가 동료 집단 내에 '수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료 지원가는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들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수록 좋다. 사람은 스스로와 비슷한 부분이 많거나, 같은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쉽게 열기 마련. 언론인들도 동료 지원가로 같은 언론인을 만났을 때 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동료 지원 과정의 세부적인 방법 중엔 '자신의 경험 공유하기'가 포함되어 있다. 동료 지원의 구체적인 방법은 2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단, 이때에도 유의할 점이 있다. 내 경험을 너무 많이 이야기하면 안 된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하다. 회복에 도움을 준다면서 "나 때는..."으로 시작해 "나 때는..."으로 끝난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 입장에서 상황이 악화될 것이다. 더욱이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비슷한 경험의 이야기를 너무 자세히 듣다 보면 오히려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음을 숙지해야 한다. "나는 어떤 방법을 활용해 봤는데, 이러한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어." 정도의 경험 공유가 적당하다. 어디까지나 대화의 초점은 내가 아닌 상대방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전문 상담이나 조언을 하라는 건 아니다.
동료 지원의 핵심은 '경청'이다. 위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동료 지원가는 전문 상담가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듣되, 마음대로 섣부른 조언을 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만약 도움이 필요한 당사자가 동료 지원가로부터 조언을 들었지만 여러 사정들로 인해 이를 따르지 않았을 경우, 다시 동료 지원가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는 일 자체가 꺼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지역 커뮤니티 내에서 찾아갈 수 있는 다른 정신건강 전문의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하고, 이들이 언제든 거리낌 없이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면 된다.
중요한 건 결국 자기 결정권 회복
정리하면 동료 지원 제도는 궁극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자기 결정권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라우마를 겪는 당사자는 자신이 직접 고를 수 있는 다양한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 또 주변에 연대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회복을 돕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이를 통해 사회가, 때로는 스스로가 자신에게 두텁게 덧씌워 놓은 일종의 낙인과 편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다만 다트 센터에서는 조직적인 차원의 지지와 지원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동료 지원 제도가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업무 환경을 만들어주고, 평소 정신건강 전문의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해 놓는 것 등의 작업엔 회사 차원의 서포트가 필요할 것이다.
연수 기간 도중 호주 국영방송인 ABC 방송국에 견학을 갔었다. ABC 방송국은 동료 지원 제도가 잘 자리 잡아 있는 기관들 중 하나다. 당시 인솔자와 함께 사무실 여러 곳을 돌아봤는데, 곳곳에 동료 지원 제도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필요한 경우 언제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면서, 동료 지원가로 활동하는 사람들 연락처도 같이 적었다.
ABC 방송국 사내 곳곳에 붙어 있었던 동료 지원 제도 안내문
호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전국 상황을 종합한 메인 뉴스를 아침에 한다. 저녁엔 각 주마다 그날그날 발생한 이슈들을 정리한 지역 뉴스를 내보낸다. 연수자들은 ABC 방송국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소위 '국민 앵커' 리사 밀러와 만났다. 리사 밀러는 한때 동료 지원가로 일했다.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동료 지원가들이 어떤 보상과 지원을 받으면서 활동하는지 물었다. 대답은 "어떠한 보상도 없다"였다. 한때 승진 인센티브 등 일종의 혜택을 제공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격 미달인 사람들이 자꾸 몰리는 부작용이 있어서 지금은 없앴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reach-out' 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P.S. 연수를 주관한 미디어 분야 전문가그룹 다트(DART) 센터 (https://dartcenter.org/) 아시아-태평양 지부에서는 동료 지원 제도에 많은 관심을 보인 한국인 연수 참가자들을 위해 2024년 1월, 이틀에 걸친 교육을 추가로 진행해 줄 수 있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래서 1월 20일부터 이틀에 걸쳐 오롯이 동료 지원 제도에 초점을 맞춘 추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 글은 이틀 간의 온라인 교육과 지난 여름 열흘 동안 호주 현지 교육에서 보고 느낀 것들 중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할 만한 부분을 골라 정리한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