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신, 사람들은 그리 불렀다.
꿈처럼 다가왔던 봄이 지나 뜨거운 여름이 다가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름의 끝자락에 닿았다. 그런 날이 오자 꼭 이맘때쯤 봄과 여름을 되짚어보고 가을을 기다리며, 겨울을 긴장하며 대비하라고 하였던 어머니의 말씀을 떠올린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고 이전보다 확실히 쌀쌀해진 공기를 맞으며 밤하늘을 눈에 담는다.
봄이 오면 겨울이 존재하기라도 했냐는 듯 추위를 보낸 나무들이 꽃을 피운다 하였다. 마치 무언가 천천히 준비하듯 탄생하고 시작되는 봄의 모습은 꼭 차오르기 시작하는 초승달의 모습과도 같았으며, 그 아래에는 첫 번째 어머니와 내가 있었다. 첫 번째 어머니는 봄에 내려오는, 처음으로 나를 감싸준 어머니. 사람들은 첫 번째 어머니를 '아르테미스(Artemis)'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마을과 떨어진 숲에서 내게 세상에 한 걸음씩 걸어 다니는 법과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처음 모든 것을 배우게 된 나는 어머니 아래에서 배운 것을 금방 익히고 곧잘 써먹고 일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넘어지면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어 주시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일어나 세상에 대해 배웠다. 새로이 시작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주로 사람들이 아침에 잘 일어날 수 있게 도와주고 자라나는 것을 도와주는 어머니는 종종 숲에서 동물들을 불러 모아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동물들과 나는 그 노래를 듣고 자라며 하루를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아름답게 빛나는 초승달 아래에서 함께 잠을 자기도 하고, 하늘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달과 별들을 눈에 담았다. 대부분 까만 하늘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컸지만 우리는 곧 달과 별이 가득 차올라 빛날 것이라고 믿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머니는 마당에 클로버를 잔뜩 심어주셨다.
그렇게 여름이 왔다. 활짝 피어난 꽃과 나무들이 제 모습을 뽐냈으며, 자라나는 동물들도 스스로가 해야 할 일들을 잘 해냈다. 밤에 환하게 떠오른 큰 보름달은 마치 태양과도 같았으며, 그 아래에는 두 번째 어머니가 있었다. 두 번째 어머니는 내가 바른길로 나아갈 수 있게 나를 비추어 주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찾아갈 수 있게 해 주었던 어머니. 사람들은 두 번째 어머니를 '셀레네(Selene)'라고 불렀다. 여름이 되고 나는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것들을 까먹거나 일부러 하지 않는 날이 생겼다. 어머니께서 종종 불같이 화를 내셨지만 또 금세 나를 보듬어주셨고, 내가 일부러 하지 않은 일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종종 내가 넘어질 때면 어머니는 묵묵히 내가 다시 혼자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셨다. 나는 기다려주는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웠다. 주로 사람들이 하루를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주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도와주는 어머니는 종종 태양보다 더 밝게 빛나는 존재 같았다. 제아무리 어둠에 갇혀도 어머니의 빛을 보고 다시 밖으로 나와 세상을 마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슬픔에 잠긴 동물과 식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활력과 빛, 에너지…. 그런 것들을 기꺼이 내어주었다. 밤이 되면 환하게 길을 비추어주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모두 알차게 보낸 하루로 달궈진 온기는 밤에 달이 떠도 쉽사리 식지 않았고 나는 그 온기를 기억하며 내일을 더 열심히 살아가기 시작했다. 달이 환하게 빛나니 어쩐지 주변에 작은 별 따위는 딱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나는 점차 자만하며 자라났다. 그런 나를 보고도 어머니는 심어져 있는 클로버 속에서 내게 행운을 찾아다 주셨다.
그리고 가을, 가을이 온다. 가을은 어떤 계절일까? 가을에 마주하게 될 나의 마지막, 나의 세 번째 어머니는 어떤 분일까? 겨울은 온전히 홀로 서는 계절이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라고 하셨던 걸까. 회상을 마치고 가을을 준비했다. 날이 조금씩 쌀쌀해지기 시작하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꾸역꾸역 눌러할 일들을 해냈다. 주변에 사람들, 식물들, 동물들… 많은 것들이 나처럼 잠시 주춤했지만 다시 자신의 일을 조금씩 해냈다. 여름 때보다 해내는 것들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작은 온기라도 나눠가지며 살아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세 번째 어머니가 오셨다.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실지 알 수 없었던, 달라진 계절처럼 조금 쌀쌀한 느낌이 드는 어머니. 사람들은 세 번째 어머니를 '헤카테(Hecate)'라고 불렀다. 서늘해진 풍경에 조금 긴장을 했던 탓일까? 나는 가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넘어졌고, 어머니의 반응을 살폈다. 세 번째 어머니는 봄의, 여름의, 앞전에 봤던 어머니들과는 완벽히 달랐다. 세 번째 어머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지도, 내가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지도 않았다. 잠시 내가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려는 듯 쳐다보다가도 금세 나를 외면하고 가버렸다. 나는 다시 일어서서 어머니가 지나간 길들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생겼을 땐 어머니께서 모든 일을 맡아 도와주시고 가르쳐주셨지만 그 외에는 우리 모두 스스로 해내야 했다. 어머니는 종종 우리에게 조언을 주고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에 대해 방안을 제시할 뿐, 그 어떤 것도 강요하거나 명령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길을, 우리가 맞이할 겨울의 형태를 직접 선택하고 꾸며나갔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온다는 것은 봄이 지나 여름이 오듯, 또 여름이 지나 가을이 다가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기분이었다. 마냥 알려주는 대로만 나아가도 시간은 지나 다가오던 것들이 이제 스스로 해나가고 결정하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은 어머니처럼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고, 더 빠르게 지나가는 듯했다. 세 번째 어머니는 사람들이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해주었고 이곳에서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들을 인도하는 일을 했다. 어머니는 종종 동물의 형태로 모습을 바꾸어 우리를 지켜보기도 하셨으며, 종종 마법을 부려 우리에게 새로운 것들을 알려주기도 했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던 어머니가 유일하게 알려준 마법들은 마치 이 세상을 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지침서 같은 기분이었다. 혹은 할 수 없다며 포기하고 있는 것을 다시 잡고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단단한 마음을 내려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기적. 마법, 한 번에 나를 바꿀 수 있는 비법 같은 거.
가을이 천천히 지나갈 때가 다가오자 나는 긴장했다. 덜컥 겁이 나 어머니의 흔적 같은 클로버가 심어진 마당에 발을 들였다. 어머니 없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행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당에 쭈그리고 앉아 다른 것들을 전부 뽑아내며 행운을 찾아 나섰다. 그때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본 내 모습에 어머니는 처음으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듯했다.
“나의 딸아, 너는 어찌 그것들을 모두 뽑아내고 있느냐.“
어머니가 물었다. 나는 고민하다 '행운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어머니는 나의 대답을 듣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작게 한숨을 내쉬다가 내 쪽으로 쭈그려 앉아 내가 뜯어둔 클로버들을 모아 내 손에 쥐어주신다.
“딸아, 행운은 분명 기쁘고 좋은 것이란다. 하지만 그 행운을 찾기 위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작은 행복들을 전부 네 손으로 망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하는 법. 생명은 쉽게 기적 같은 일을, 한 번에 인생이 바뀌는 꿈을 꾸곤 한단다. 하지만 보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언젠가 다가올지 확실하지도 않은 기적에 전부 걸어 던지는 것은 미련한 일이야. 이것 봐, 네가 가꾸어 온 마당이 망가졌잖니.”
나는 멍하니 손에 가득 쥐어진 클로버들을, 내 행복을 바라봤다. 가을이 다가온 것도 잠시 겨울이 다가온다. 내가 망가뜨린 내 행복을 바라보고 우는 나를 말없이 안아주는 어머니, 그 위로 서서히 지고 있는 그믐달이 빛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달보다 더 밝을지도 모를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내가 잊고 있었던 작은 나의 행복들, 나의 재능들.
그 사실들을 담아내고 나자 다가올, 어머니가 없는 겨울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아 졌다. 나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게 도와준 첫 번째 어머니, 세상엔 종종 행운이 따르는 순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준 두 번째 어머니, 그리고 그 행운에 눈멀어 자만하지 않고 내 행복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세 번째 어머니. 나는 세 어머니에게 충분히 이 세상을 견디고 살아가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일어서지도 못하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배웠고, 내 주변에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도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아나갈 수 있는 법을 배웠으니까.
날이 시리다. 나는 스스로 온기를 낼 줄 알며, 나눌 줄도 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지 알고 있으며, 눈이 쌓여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길들도 내가 스스로 걸어 나갈 수 있다.
이 글은 태초의 신이 다른 세계의 신의 이름을 빌려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시작된 아르테미스, 셀레네, 헤카테의 첫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