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헌은 그런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판넬을 문구를 더 추가했다
[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상한 히어로맨 연기 안 함 ]
그리고 상황극을 부탁하는 여성 직장인도 있었다. 주말에 종종 체육복을 입고 진헌에게 찾아오는데 자기 상사 성격이나 스타일을 상세히 기록한 걸 보여주고,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면서 상황극을 같이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사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 잡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 때가 많은데 맞서기에는 두렵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상황극을 연습해서 언젠가는 상사에게 맞서서 싸우고 싶다고 진헌에게 포부를 전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유명한 연극의 주인공 역할을 보고 싶다며 연기를 주문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정말 자주 오는 고등학생 여자애가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도 연기 부탁드려요 제가 늘 요청하는 거요!”
“흠, 돈은 가져왔어?”
“그럼요! 아, 근데 자주 오는데 할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대학로 연극들 보면 다 할인해 주던데! 전 학생이라 돈도 별로 없단 말이에요!”
“안돼 인마, 원래 세상은 냉혹한 거야 아저씨도 백수라 돈이 별로 없어,
넌 백수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학생보다 백수가 더 불쌍해”
“어휴 진짜 영업 못해 그러면 빨리 연기해 줘요. 이거 보고 얼른 집에 가게요”
여학생은 5천 원을 진헌에게 건넸다. 진헌은 씩 웃더니 고개를 돌리고 숨을 한번 정돈하고
여학생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진헌은 양손으로 여학생의 어깨를 잡고 지긋이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건넸다.
“미리야, 오늘 학교 잘 갔다 왔니? 점심은 잘 챙겨 먹었고?”
“응 아빠, 오늘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엄청나게 잘 봤어, 점심도 싹싹 다 비워 먹었지!”
“역시 내 딸, 공부도 잘하는구나. 그게 참 어려운 일인데, 미리는 어쩜 이렇게 잘할까?”
진헌은 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미리야, 너는 아빠에게 참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의 눈에서 가장 반짝이는 존재는 너란다.
그러니 늘 자신감 잃지 말고, 고개를 늘 높이 들고 다녀. 너의 뒤에는 늘 아빠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말이야.”
미리는 진헌이 자신에게 따듯하게 말해주는 동안 그의 입 모양을, 그의 다정한 눈빛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바라보았다. 진헌의 연기가 끝나자마자 미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배시시 웃는다.
“허! 참 크흠 진짜 아저씨의 연기는 너무 다정해서 가끔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들으면 정말 좋단 말이야.”
진헌도 뭐 쑥스러운 듯이 하늘을 보면서 뒷머리를 손으로 긁적거리며
“자 됐지? 빨리 집에 가요. 손님”
미리는 씽긋 웃으며 발길을 돌려 걸어가다 갑자기 진헌의 방향으로 몸을 휙 돌린다.
“아저씨 나도 아저씨처럼 배우가 되고 싶어서 이번에 연극 동아리 들었어요. 짱이죠?”
“야야 하지 마, 아저씨 꼴을 봐라! 연기하지 마! 빨리 집에 가서 공부나 해”
“흥 오늘 시험 끝났는데 무슨 공부예요! 하여튼 정말 사람 말 안 들어 저 갈게요”
미리는 겨울에 진헌이 공원에서 연기를 시작했을 때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정한 아빠의 연기를 해줄 수 있냐며 다가왔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미리 모습에 진헌은 ‘다정한 아빠 역할이 왜 필요할까?’ 싶었지만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며 미리에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고 다정한 아빠의 연기를 미리에게 보여줬었다.
미리는 진헌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진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했다.
“아저씨는 왜 무대에서 돈 안 벌어요? ” “몰라도 돼”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32살”
“아저씨처럼 연기하려면 어디서 배워야 해요?” “뭐 학원이나…. 대학교?”
“아저씨 혼자 살아요?” “그거 알아서 뭐 하게”
진헌은 미리의 질문에 한두 개씩 대답을 해주다가 끝없는 질문에 이내 귀찮아져서
“야야 너 연기 주문 안 할 거면 집에 가서 공부나 해 인마”
괜한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 미리는 또 방긋 웃으며 그럼 내일 또 와서 연기 주문할게요! 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도록 자주 찾아오는 단골이 되었다.
진헌은 미리가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는 말에 상념에 젖었다.
언제까지 이 공원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돈이 필요했고 해서 이렇게 공원에서 철판을 깔고 연기를 팔고 있지만 꼭 동네 구걸쟁이가 된 것만 같았다.
진헌은 ‘내가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한참 하다가 공원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근데 뒤에서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헌을 불렀다.
“저… 저기요 형”
중학생 교복을 입은 통통하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학생이 입을 우물쭈물하며 진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공원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연기가 가능해요?”
계속..
“저… 저기요 형”
중학생 교복을 입은 통통하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학생이 입을 우물쭈물하며 진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공원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연기가 가능해요?”
중학생이라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진헌은
“밖에서는 안 해요, 애니메이션 캐릭터 연기도 안 돼요” 하고 진헌은 손을 훠이훠이 휘날렸다.
“애니메이션 연기 아니에요…. 그냥 밖에서 연기 2~3시간만 해주면 안 돼요?
별거 아니에요. 이번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진헌은 떨떠름하게 학생을 쳐다보자 남자 중학생은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를 여러 개 꺼내서 진헌에게 보여준다
“제가 10만 원 정도 있는데 이걸로 어떻게 안 될까요?”
진헌은 잠시 그 돈을 쳐다보다가 담배를 끄고 학생을 바라보며 활짝 웃는다
“어떤 역할이 필요하실까요? 손님.”
그제야 학생은 안심한 듯 순박하게 웃으며
“저 내일이 생일인데 친구 역할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냥 피시방 가서 게임하고 노래방 같이 가서 놀아주세요”
“그거면 돼?”
“네 저는 사실 생일날 친구들이랑 같이 논 적이 별로 없어서…. 전학을 와서 더 친구가 없기도 하고….
이번 생일만큼은 친구랑 같이 놀고 싶었어요”
진헌은 더 물어보지는 않았다.
“너 이름이 뭐야? ”
“저는 이규민이라고 해요”
“그래 규민아, 내일 너 학교 수업 끝나고 보자, 내가 교문 앞에서 기다릴게”
규민이는 잇몸을 활짝 드러내고 웃는다
“형 그러면 내일 봐요! ” 하고 손을 크게 흔들며 뛰어갔다.
다음날 미리는 또 진헌의 연기를 보려고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곧장 공원으로 달려갔지만, 진헌이 있었던 벤치에는 판넬만 덩그러니 있었다.
“아저씨가 출장도 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