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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정 Mar 05. 2024

연기를 팝니다 -1화-


[원하는 모습으로 연기해 드립니다. 단돈 5,000원]



종이 박스를 뜯어 검은 매직으로 대충 휘갈겨 쓴 문구, 진헌은 공원 벤치에 판넬을 세워 두고 팔짱을 낀 채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공원에 벚꽃이 만개해 다들 하늘에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벚꽃 잎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진헌이 있는 공원은 옛날 동네치고는 규모가 꽤 큰 공원이었다. 

수로가 공원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개천이 흐르고 있었고, 수로 양 갈래로 산책길이 아주 곧게 쭉 뻗어 있었다. 수로 산책길을 따라가다 보면 광활한 잔디밭도 나오고 공원 광장 한가운데에 번데기, 솜사탕, 호두과자 등등을 파는 노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 노점들이 모여있는 근처 벤치에 진헌은 자리를 잡았다


공원에는 느릿한 걸음으로 지팡이를 짚으며 걸어 다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있었고, 또는 등산복을 입고 씩씩하게 경보 걸음으로 운동하는 중년 아주머니들, 그리고 개들을 산책시키는 사람들로 다양한 사람들이 공원을 거닐고 있었다. 잔디밭에 놓인 나무 테이블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둑을 두는 할아버지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진헌이 무턱대고 이 공원에 나와 연기를 한지는 한 어느덧 4개월 정도가 되었다.


무대에서 연기를 그만두고 백수로 계속 지내다 이러다가는 굶어 죽을까 싶어 무턱대고 공원에 

[연기해 드립니다. 단돈 5,000] 판넬을 옆에 세우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견디며 두꺼운 패딩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꼬옥 넣은 채 벤치에 덜덜 떨면서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공원 노점 상인들이 관심을 가졌고, 코끝이 벌게져 있는 게 불쌍해 상인들은 호두과자를 주거나 붕어빵을 쥐여주었다. 번데기 파는 아주머니는 호기심이 많은 아주머니였다. 


“뭐야? 5천 원만 주면 뭐든 연기해 주는 거야? 아무거나?” 


“네 뭐…. 아무거나 다 해요. 돈만 내시면 원하는 대로 연기해드립니다”


“그래에? 아이고 그럼 어디 보자... 그래! 나를 좋아하는 남자로 나에게 엄청 애절하게

고백해 주는 연기 해봐! 나도 어디 잘생긴 남자에게 고백 좀 받아보는 게 꿈이었어~”


그러자 진헌은 검은 백 가방에서 주섬주섬 장미꽃 소품을 꺼내고 한번 헛기침을 하더니 연기를 시작했다. 

아주머니를 아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고백하기 시작했다.


“지난날 계속 공원에서 당신을 바라봤어요, 번데기를 파는 모습이 당신의 밝은 웃음, 그 웃음 위에 발그레한 홍조가 참 좋아 보였어요, 번데기를 퍼주는 당신의 벌게진 손... 그 손 내가 평생 따듯하게 꼭 잡아주면 안 될까요? 제가 따듯하게 보듬어 주고 싶어요” 


진헌은 아주 따듯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번데기 아주머니를 몇 초간을 지긋이 바라봤다. 

유치했지만 번데기 아주머니는 진헌의 눈을 바라보더니 이내 소녀 같은 얼굴로 바뀐 채 큼큼거렸다. 진헌의 연기를 구경하던 몇몇 상인들은 “어휴 오글거려” 표정을 찡그리며 막 손사래를 치지만, 번데기 아주머니는 쑥스러운 듯 막 허허 한참을 웃는다. 즐겁게 웃으시더니 갑자기 도도한 척 팔짱을 끼시더니 


“날 좋아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 마음 못 받아주겠네, 난 이미 남편이 있어” 


하고 고개를 휙 하고 돌리는 시늉을 했다. 진헌은 조금 당황해서 1~2초 멍하니 있었다.

그런 진헌을 보고 번데기 아주머니는 깔깔깔 웃더니 “아니 잘생긴 사람에게 고백도 받아보고 싶었지만, 한번 매몰차게 차보는 역할도 해보고 싶었어! 호호호”


“남편은 있기는 한데. 저기 땅속으로 들어가 부렸어~ 그러니까 걱정 말어”


“아이고 그래도 이렇게 잘생긴 총각에게 고백받으니, 기분이 좋기는 하네~ 내 종종 자주 이용해야겠구먼 이거 번데기도 먹어봐아~”


아주머니는 진헌에게 5천 원과 함께 종이컵에 번데기를 가득 담아주셨다.

진헌의 외모는 번데기 아주머니가 말한 대로 훤칠하고 잘생겼었다. 이목구비가 진하게 생겼고 얼굴에 수염도 덥수룩하게 있고 옷도 그냥 긴 검은 롱패딩을 입고 있었지만, 그런 것조차도 매력 있게 보일 정도로 훤칠하게 잘 생겼다.

그런 잘생긴 진헌이 공원에서 생뚱맞게 연기를 5천 원에 판다고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공원에 자주 오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사기에 딱 좋았다.

사람들은 호기심에 한두 명씩 진헌에게 5천 원을 주고 자신이 원하는 연기를 주문을 했다. 이미 번데기 아주머니는 진헌에게 단골이 되었고, 진헌은 사람들의 주문에 따라 남편이 되기도 했고, 친구가 되기도 했고, 아빠가 되기도 했으며 다양한 역할을 공원에서 연기했다.

비록 공원 한복판에서 연기를 하는 거였지만 진헌의 감칠맛 나게 잘하는 생활 연기력에, 연기에 임하는 진정성에 대해 다들 조금씩 정이 들었고 어느새 공원에서 진헌이 연기하는 모습이 공원의 풍경처럼 익숙해졌다. 동네 사람들은 커피 한잔 사서 마시듯이 진헌의 연기를 5천 원에 사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즐겼다.


연령대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와서 연기를 주문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끔은 초등학생 무리가 몰려와

 “아저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연극은 무대에서 하는 거 아니에요? 왜 공원에서 해요?” 


핫도그를 우적우적 먹으며 진헌에게 질문 폭탄을 남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아저씨 그러면 포켓몬 피카츄 연기도 가능해요?” , “나는 번개맨! 번개맨 연기해 줘요. 아저씨!””


진헌은 그런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판넬을 문구를 더 추가했다

[ 애니메이션 캐릭터 이상한 히어로맨 연기 안 함 ]


그리고 상황극을 부탁하는 여성 직장인도 있었다. 주말에 종종 체육복을 입고 진헌에게 찾아오는데 자기 상사 성격이나 스타일을 상세히 기록한 걸 보여주고,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해 주면서 상황극을 같이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사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꼬투리 잡거나,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 때가 많은데 맞서기에는 두렵고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상황극을 연습해서 언젠가는 상사에게 맞서서 싸우고 싶다고 진헌에게 포부를 전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말동무가 되어달라는 할아버지도 있었고, 유명한 연극의 주인공 역할을 보고 싶다며 연기를 주문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에 정말 자주 오는 고등학생 여자애가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오늘도 연기 부탁드려요 제가 늘 요청하는 거요!”


“흠, 돈은 가져왔어?”


“그럼요! 아, 근데 자주 오는데 할인 좀 해주시면 안 돼요? 대학로 연극들 보면 다 할인해 주던데! 전 학생이라 돈도 별로 없단 말이에요!”


“안돼 인마, 원래 세상은 냉혹한 거야 아저씨도 백수라 돈이 별로 없어,

넌 백수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학생보다 백수가 더 불쌍해”


“어휴 진짜 영업 못해 그러면 빨리 연기해 줘요. 이거 보고 얼른 집에 가게요”


여학생은 5천 원을 진헌에게 건넸다. 진헌은 씩 웃더니 고개를 돌리고 숨을 한번 정돈하고

여학생을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진헌은 양손으로 여학생의 어깨를 잡고 지긋이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건넸다.


“미리야, 오늘 학교 잘 갔다 왔니? 점심은 잘 챙겨 먹었고?”


“응 아빠, 오늘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엄청나게 잘 봤어, 점심도 싹싹 다 비워 먹었지!”


“역시 내 딸, 공부도 잘하는구나. 그게 참 어려운 일인데, 미리는 어쩜 이렇게 잘할까?”


진헌은 미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미리야, 너는 아빠에게 참 사랑스러운 존재야, 나의 눈에서 가장 반짝이는 존재는 너란다.

그러니 늘 자신감 잃지 말고, 고개를 늘 높이 들고 다녀. 너의 뒤에는 늘 아빠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말이야.”


미리는 진헌이 자신에게 따듯하게 말해주는 동안 그의 입 모양을, 그의 다정한 눈빛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바라보았다. 진헌의 연기가 끝나자마자 미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 배시시 웃는다.


“허! 참 크흠 진짜 아저씨의 연기는 너무 다정해서 가끔 오글거리지만 그래도 들으면 정말 좋단 말이야.”

진헌도 뭐 쑥스러운 듯이 하늘을 보면서 뒷머리를 손으로 긁적거리며


“자 됐지? 빨리 집에 가요. 손님”


미리는 씽긋 웃으며 발길을 돌려 걸어가다 갑자기 진헌의 방향으로 몸을 휙 돌린다.


“아저씨 나도 아저씨처럼 배우가 되고 싶어서 이번에 연극 동아리 들었어요. 짱이죠?”

 “야야 하지 마, 아저씨 꼴을 봐라! 연기하지 마! 빨리 집에 가서 공부나 해”

“흥 오늘 시험 끝났는데 무슨 공부예요! 하여튼 정말 사람 말 안 들어 저 갈게요”


미리는 겨울에 진헌이 공원에서 연기를 시작했을 때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다정한 아빠의 연기를 해줄 수 있냐며 다가왔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미리 모습에 진헌은 ‘다정한 아빠 역할이 왜 필요할까?’ 싶었지만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며 미리에게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고 다정한 아빠의 연기를 미리에게 보여줬었다.


미리는 진헌과 조금씩 친해지면서 진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많이 했다.

“아저씨는 왜 무대에서 돈 안 벌어요? ” “몰라도 돼”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32살”

“아저씨처럼 연기하려면 어디서 배워야 해요?” “뭐 학원이나…. 대학교?”

“아저씨 혼자 살아요?” “그거 알아서 뭐 하게”


진헌은 미리의 질문에 한두 개씩 대답을 해주다가 끝없는 질문에 이내 귀찮아져서

“야야 너 연기 주문 안 할 거면 집에 가서 공부나 해 인마” 


괜한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 미리는 또 방긋 웃으며 그럼 내일 또 와서 연기 주문할게요! 하면서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나도록 자주 찾아오는 단골이 되었다.


진헌은 미리가 연극동아리에 들어갔다는 말에 상념에 젖었다.

언제까지 이 공원에서 연기를 해야 하는 걸까? 연기를 포기할 수 없었고, 돈이 필요했고 해서 이렇게 공원에서 철판을 깔고 연기를 팔고 있지만 꼭 동네 구걸쟁이가 된 것만 같았다.

진헌은 ‘내가 다시 무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고민을 한참 하다가 공원 밖으로 나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근데 뒤에서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헌을 불렀다.


“저… 저기요 형” 

중학생 교복을 입은 통통하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학생이 입을 우물쭈물하며 진헌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공원 말고 다른 장소에서도 연기가 가능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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