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도 '정'이 흐른다.
수채화 같던 풍경은 이제 끝인가 하다가, 겨울이 갑자기 찾아왔다.
이곳은 겨울이 빨리 시작되고 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빠르게 계절이 급변할 줄은 몰랐다.
11월 중순이 채 되기 전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깨 창밖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눈이 오면 어떻게 하지(눈길운전.. 내가 할 수 있을까?).
캐나다의 겨울은 내 템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니, 잠깐만요.”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적응력은 곧 생명력이다.
첫눈이 내리던 그날, 정말 조심스레 차를 운전해 교회를 다녀오고 오후는 집에서 쉬기로 했다. 밤에 또 눈 소식이 있어서 다음 날 학교에 갈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눈발은 약하게 내리다 그쳤다.
아침, 눈은 오지 않았지만 차가 아주 꽁꽁 얼어있었다. 시동을 걸고 20분이나 기다려야 했고, 시계를 보면서 슬슬 불안해졌다. 그러다 이내 마음을 놓기로 했다.
'이런 날 좀 늦으면 어때.‘
드디어 와이퍼가 움직였고, 우리는 출발했다. 약간 긴장한 상태로, 평소보다 속도를 줄이고, 브레이크는 나눠서 밟고_머릿속으로 길이 미끄러울 때의 운전방법을 되뇌면서. 다행히 도로상태는 이미 제설작업이 깨끗하게 되어있어서 말끔했고, 밝아오는 햇살 덕분에 시야도 좋아지고 길도 점점 마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학교에 제때 도착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는 걸 지켜본 뒤 출발 전 휴대폰을 확인하는데,
"00의 등하굣길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윗집 YJ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차에서 눈물이 팡 터져버렸다. 누군가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큰 위안이었다.
긴장은 유머로도, 눈물로도 풀린다. 돌아오는 길에 연신 "감사합니다"를 중얼거렸다.
햇살에도, 이 하루에도.
...
그렇게 첫눈이 끝나는 줄 알았다. 멋들어진 해피엔딩인 줄 알았는데..?
그날 밤, 눈보라가 치면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며 다음 날 학교 갈 생각을 이미 반쯤 접긴 했지만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밤이지만 눈이 와서 은은하게 빛나는 뒷마당이 참 예쁘다 생각하며.
아침에 일어나서 창밖과 날씨를 확인하자마자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쉬는 거다. Snow Holiday는 이런 날이지.'
이미 잠은 깼지만 아이의 옆에서 누워 있다가 뒤척이는 아이의 귀에 대고
"오늘 학교 못 가. 눈이 너무 많이 왔어~"했더니 아이는 잠결에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린다.
'매우 신난다'는 의미다.
잠시 후, 학교에서도 <School Closed> 알림이 떴다. 좋았어. 공식적인 휴일이란 말씀.
오전은 테라스에 쌓인 눈으로 울라프의 친구 같은 눈사람 둘을 턱턱 만들어 두고, 눈싸움을 했다. 이곳의 눈은 아주 단단하게 잘 뭉쳐지는 눈이었다. 눈싸움하다가 아이가 던진 눈덩이가 꽤 아파서 은근 부아가 났다. 나도 진심으로 던졌다. 전쟁이야~!
아, 이런 눈을 예전에 엄마가 ‘떡 눈’이라고 부르셨다. 흰 떡처럼 탱글탱글해 보여서일까.
눈에 익숙한 이 고장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는 아직 스노부츠와 눈대비 용품이 없었다. 눈싸움을 하고 들어오니 운동화가 완전히 젖었다. 더는 버틸 수가 없어서 오후에 장비를 사러 나가려 했는데, 차가 눈에 파묻혀있다. 지인이 바로 그 전날 “여긴 차에 눈 치우는 도구가 필수예요.” 하며 주신 빗자루가 달린 장비가 있었는데 그걸로 눈을 치워내니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와.. 유물을 발굴하는 느낌(에 댈 것은 아니지만)은 이런 걸까 하고 괜히 신이 났다. 마트에서 각자 스노부츠를 골랐는데, 아이가 ‘썰매'를 사달라고 했다. 음, 캐나다에서 보내는 겨울이 이번 딱 한 번 뿐임이 떠올라 조금 망설여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지인한테 물어보려고 연락을 했더니 여분의 썰매가 있다고 가져가라고 하신다. 신이 나서 썰매를 받아서 오는 길,
“00야, 엄마가 역시 인복이 많지? 썰매도 받아오고!”
아이에게 약간 우쭐대면서 곧바로 ‘썰매맛집’이라는 인근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의 언덕은 온통 눈으로 하얗게 덮여있어서 겨울왕국을 떠올리게 했고, 우리는 'Let it go'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자연이 만들어 낸 썰매장에는 스노보드를 연습하고 있는 아이, 그 옆에서 스키를 타는 아이, 그리고 썰매를 끌고 하나 둘 모여드는 동네 아이들로 활기가 차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겨울이 제일 싫었다. 추운 것도 싫고, 옷을 두껍게 껴입어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싫었다. 무엇보다 추운 날씨에 병치레가 잦았기 때문에 더 걱정됐던 계절이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인의 호의로 빌린 썰매를 앞으로도, 뒤로도, 엎드려도 타며 눈밭에서 뒹구는 아이를 보니 나도 겨울이 조금 좋아지려 했다.
눈으로 범벅이 돼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오들오들 떨 정도로 춥고 질척였지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집에 도착하니 문 앞에 김치가 한 통이 놓여있었다.
'아, 오늘 김장하신다고 하셨지.’
이 먼 캐나다에서, 이 눈 속에서 김장을 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몇 개월 머물다 떠날 우리에게 김장김치를 나눠주시다니. 얼마나 따뜻하고 귀한지.
아이가 김치를 보고 말했다. "엄마, 우리 주변에는 참 친절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 그렇지?" 정말 그랬다. 캐나다에서 '김장김치'를 받아먹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김치통을 들고 이만큼 '정'스러운 음식이 또 있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계신 엄마도 김장을 하실 때가 됐겠지. 이 따뜻한 김치를 보면서, 딸내미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잘 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졌다.
눈이 또 와도 좋겠다.
겨울이 조금 좋아졌으니까.
또 썰매 타러 가자.
-희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