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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얼 Oct 23. 2021

맨드라미

엄마가 나를 임신했을 때, 할머니께서는 그 시대 어른들이 그러했듯. 당연하게도 내가 아들이길 간절히 바라셨다. 위로 이미 언니가 태어나 장녀의 자리는 채웠으니 장손이 얼마나 간절하셨을까.

그런 간절한 바람 속에 나는 눈치도 없이 건강한 둘째 딸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후에도 할머니의 그 간절한 바람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으셨는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들 손주를 대신해 내가 그 바람을 채워드려야 했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사내아이처럼 키우길 바라셨다. 머리는 늘 짧게 밀고 옷도 사내아이들이 입는 옷으로 골라 입히게 하셨다. 당시 엄마는 할머니의 말을 어길 수 없어 매번 억지로 내 머리를 짧게 잘라주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선택권이란 있을 리가 없었겠지. 짧은 머리에 바지 차림 누가 봐도 말썽꾸러기 사내아이 같은 모습으로 나는 동네 아이들과 골목을 누비며 자랐다. 

어느 날인가는 신나게 뛰어놀고 들어와 엄마에게 '엄마, 엄마 나는 남자지?'라고 대뜸 묻곤 했단다. 물론 누가 봐도 영락없는 사내아이의 모습을 한, 채 다섯이 안된 딸아이의 질문에 엄마는 뭐라고 대답을 해줬는지

질문을 했던 나도 답을 했던 엄마도 기억은 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집 앞 화단에 항상 꽃을 가득 심었다. 집에서 얼마 떨어진 화단에 물을 줄 때면 할머니는 그 시절 내 무릎이 넘는 높이의 커다란 물통에 물을 한가득 받아 계단을 오르내려 몇 번이나 화단까지 들고 나르게 시키었다.


너무나도 건강히 태어나 더더욱 튼튼하게 자란 나는 그깟 물통쯤이야 거뜬히 들 수 있었지만 언니도 남동생도 있는데 굳이 나를 불러 매번 물을 나르라는 할머니의 마음은 알다가도 몰랐다. 

아마 나는 모르고 싶었다.


할머니 화단에는 이름 모를 꽃이 가득했는데 그중에서도 ‘맨드라미’를 가장 아끼셨다. ‘맨드라미’라는 꽃은 그 모양새가 꽃이라기엔 조금은 특이해 '계두(鷄頭) 화'라는 이름처럼 꽃망울이 꼭 닭 볏 모양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조금 징그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법한데, 모양 보통의 꽃과는 달라서 꽃잎이 주름진 주머니 모양에 솜털로 덮여있어 이름처럼 꼭 닭 볏을 연상케 한다. 색 또한 흑백사진에서 눈에 띄게 도드라져 보이는 빨간 입술처럼 주변의 모든 색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강렬한 붉은빛을 띤다. 게다가 줄기와 잎도 곧고 날카롭게 나있어 어린 시절 내 눈에는(사실 지금도) 맨드라미는 꽃이 아니라 곤충이나 다른 무엇인가로 보였다.

이런 맨드라미를 애지중지 키우시면서 할머니께서는 항상 ‘곱다, 곱다’ 하셨었다. 맨드라미는 할머니를, 그리고 어린 시절 사내도 여자아이도 아니었던 나를 떠올리게 한다.

어느 날인가 찾아본 맨드라미의 꽃말은 '건강, 방패'.


그 시절 화단 가득 방패가 빽빽이 세워져 있었지만 까까머리 소녀에겐 그 무엇도 방패가 되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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