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품은 산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위안이다. 지난 토요일에 백록담을 보고 왔다. 제주 공항 탑승구 앞에 철퍼덕 주저앉아 깔끔하게 당일 후기도 마쳤다. 스마트폰 자판으로 버벅거리며 마쳤다는 그것만으로 신기했다. 귀가해 뜨겁게 샤워 후 자정 전 잠자리에 들었다. 스물두 시간의 몽롱하고 숨차고 급박한 토요일 하루였다.
백록담은 한라산 일곱 개 탐방로 중 가장 힘든 코스다. 눈 쌓인 관음사 탐방로 왕복 코스가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다. 열 시간쯤 숨차게 사만보 가까이 찍는다. 푹푹 빠지는 눈이 다리를 잡는다.
진하게 깊어가는 한라산 관음사 코스로 들어가면서도 다시 관음사로 내려올지, 반대편의 길고 길어 지루하고 완만한 성판악 코스로 내려올지 정하지 않았었다. 그게 인생이려니. 백록담을 보고 나서 내려올 길을 정했다. 길게 걸으며 생각하며 천천히 가자 했다. 그리움을 최대한 길게 늘이며 걷고 싶었다.
8시간 30분쯤 걸었으며 지난 백록담 기록을 깼다. 30분이 뭐라고 내 기록을 내가 깬 것뿐인데 기뻤다. 하루하루 성장해 간다는 느낌보다 하루하루 제대로 정리해가고 있다는 편안함이 좋다. 나는 어제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과거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기억이 없다. 오늘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도 괜찮다 하며 산다.
똑같이 새벽에 일어나고 똑같이 비행기를 타고 똑같이 한라산에 다녀온 이번 여행은 이상하게도 새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말 걸었던 또는 내가 마음을 내밀었던 그 사람들, 일요일 내내 그들의 표정과 말이 마음에 남았다. 내 얼굴이 드디어 편하게 말 걸어도 된다 정도의 등급이 된 걸까. 내가 문득 말 걸어도 내 마음이 편할 정도의 사람을 만난 걸까.
비행기에 탑승해서 배낭을 짐칸에 올리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한라산 가시나 봐요?" 한다. 화들짝 마주 보니 헐렁한 운동복 바지에 운동화 신은 청년이다. "아, 네." 대답을 하고 있는 신기한 나를 본다. "한라산 추울 텐데요..." 얇은 경량 패딩이 걱정되나? 안에 입은 나시 셔츠가 보이나? 더 이상 대답은 하지 않았다. 아, 네라고 한 것만 해도 나는 내가 새롭다. 그런데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하게 나를 걱정해 주는 것 같아서 고맙더라. 3초 대화에.
관음사 탐방로 입구에서 마주친 한라산 국립공원 직원이 분주하다. 들어갈 수 있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내 QR코드를 내밀었더니 웃으며, "보내 드려야죠." 한다. "백록담 꼭 보고 오세요." 인사하는데 나는 눈으로만 끄덕, 한 마디 인사말도 건네지 못했다. 3초쯤의 그의 인사, 가슴에 그대로 내려앉아 나를 온전한 백록담으로 안내했다. 백록담은 잘 있더라.
한라산은 날씨를 가늠하기 힘들다. 정상에서 따뜻했는데 이상하게도 내려오면서 바람이 세게 불고 흐린 날씨에 한기가 심했다. 마치 눈이 올 것 같았다. 옷을 꺼내 입고, 발목을 뽑을듯한 무거운 등산화를 중간 진달래 대피소에서 가벼운 컨버스화로 갈아 신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 돌들이 그대로 감각으로 타고 들어와 피곤함을 깨웠다. 발목이 돌아가거나 넘어지면 끝장이라 정신이 더 바짝 들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산행을 하면서 이렇게 말 거는 사람 처음이다. "발 아프지 않으세요? 혹시 그 컨버스화를 특수제작하신 건가요? 군용이라든가..." 뭐라고 대답하지?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두 넉살 좋아 보이는 아이들이다. "발은 괜찮습니다. 특수제작 아니에요."
둘이 지나가며 한번 더 돌아보고는 갸우뚱 뭐라 뭐라 한다. 이게 뭐니? 화용론 가르치는 인간의 이 부적절한 대답이라니! 그래서 이론과 실제는 멀고도 먼 건가? 저 아이들이 다음번 한라산 올 때 컨버스 운동화 신고 오지 않기를 갑작스럽게 당황하며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내 삶의 맥락, 그 범위가 어디인지 매일 당황하면서 매번 적절치 못하다. 사는 게 갑자기 두려워지고 소심해진다. 어디까지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 걸까. 일요일 내내 왜 나는 토요일 나를 지나간 사람들에 매달려 있었던 걸까. 사람들은 항상 나를 놀라게 한다.
그리움을 쌓는다. 맥락 없음 속에 쌓이는 그리움이 두렵다.
사진 - 와인 잔에 비친 주방 등 20231112
#라라크루 (1-5) #라라라라이팅 나의 그리움, 맥락 찾아 삼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