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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워녕 Apr 23. 2021

이 세상의 말. 아니, 나의 말.


  경제 용어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다.


  "많이 힘들죠?"라는 질문은 "돈 많이 못 벌고 있죠?"라는 의미였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이 하나도 안 힘들어서 "힘들긴요^^ 괜찮습니다!"라고 했는데, 이건, 그러니까, 금수저 능력자의 여유로운 대답과 같은 것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자리 잡았던데요!"라는 말은 "요즘 돈 많이 버는 것 같던데요!"라는 말이었다. 나는 '나를 이 동네 사람으로 인정해주었구나!'하고 뿌듯했었는데.


  "장사 잘하고 있어요?"라는 질문은 "한 손님 한 손님에게 주문받고 정성껏 커피 내려드리는 과정에 실수 없이 매끄럽게 하고 있어요?"라는 질문이 아니었다. 아니 그냥, "돈 많이 벌고 있어요?"라고 물어보면 될걸. 나는 "점점 잘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는데, 덕분에 이 동네의 신흥 부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말들이 '돈'과 관련된 말이었다.


  내가 별생각 없이 하는 말들도 '돈'과 관련된 말이 되었다. 나는 로스팅도 해야 하고 재고정리도 해야 해서 정말 바빠서 "지금 좀 바빠서요"라고 했는데, 그 말은 "지금 돈을 엄청 벌고 있어요"라는 말이 되었다. 비가 와서 로스팅을 다음날로 미뤄두고 "비가 와서 여유롭네요"라고 했을 뿐인데 돈을 못 벌고 있다는 말이 되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한다고 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돈을 긁어모은다는 말이 되었다.


  돈으로만 말하는 세상인가 보다.




  커피 한 잔의 값을 결제하는 건 소액결제에 속한다.


  손님 입장에서도 카페에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는 돈은 그리 큰돈이 아니지만, 커피를 파는 입장에서도 커피 한 잔으로 버는 돈은 그리 큰돈이 아니다. 한 번에 몇천 원, 아무리 많아야 2~3만 원이다. 한 번에 (무려) 커피 10잔을 테이크 아웃해도 3~4만 원을 버는 게 전부인데, 부가세 떼고 카드 수수료 떼고 재료 원가 제하고 나면 사실 남는 것도 별로 없다. 거기에 월세에, 관리비에, 인터넷비, 전화비, 렌탈비, 아르바이트비, 그 외 등등을 다 빼고 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세상의 모든 자영업자분들... 힘내십쇼ㅠㅜㅜ) 


  순수익을 계산하지 않더라도, 아무튼 한 번에 버는 돈은 몇천 원이다. 둘이 와서 커피 두 잔을 시켜도 1만 원이 넘는 경우는 많이 없다. 큰돈이 아니다. 월급으로 몇십만 원, 몇백만 원씩 한 번에 통장에 꽂히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이렇게 야금야금 돈을 벌다 보니 '돈을 번다'는 개념 자체가 없어지는 느낌이다. 물론, 마감 정산할 때나 주말 정산, 월말 정산을 할 때면 '돈을 벌긴 버나보다' 하지만, 손님에게 주문을 받고 돈을 받을 때는 '돈을 번다'는 느낌이 아예 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장사 잘 되나요?"라고 은근히, 아니 대놓고 물어보는, 경제논리만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돈을 번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다.




  장사의 세계에 발을 담근 지 4개월이 되었다.   


  나는 커피를 팔고, 손님은 커피를 산다. 주문을 받고, 돈을 받고, 커피를 만들고, 커피를 손님 손에 쥐어주는 일의 반복이다. 이제는 "주문 도와드릴까요?" "따뜻하게 드시나요?" "아이스로 드릴까요?" "드시고 가시나요?" "영수증 드릴까요?" "커피 드릴게요" "맛있게 드세요!" 하는 말들이 입에 붙어 술술 나온다.


  우리 카페는 단골손님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그 말은 즉, 같은 손님을 자주 만난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분이 어떤 커피를 선호하시는지 이미 알고 있고, 그분의 어제와 오늘을 안다. 우리는 "안녕하세요!", "오셨어요!"로 반갑게 인사하고, "가볼게요~", "들어가세요~"로 또 인사한다.

  "7000원 결제 도와드릴게요! 카드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어떤 손님은 "그냥 막 긁어요, 여기서 먹는 건 안 아까우니까."라고 하신다. 나는 "귤 좀 드릴까요?" 하며 귤을 드리고 "몽쉘 좋아하세요?" 하며 몽쉘을 드린다. 손님들과 그런 알콩 달콩을 하는 게 좋아서 카운터 밑 서랍에는 몽쉘이, 냉장고 가장 위칸에는 귤이 한가득 들어 있다.


  장사란 이런 것인가 보다, 하고 알아가는 것 같은 그런 요즘, 한편으론 아예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안 그래도 나는 '돈을 번다'는 개념이 없는데, 이렇게 손님들과의 '우리 사이'가 만들어지다 보니, 더 '돈을 번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다. 아무튼 손님들이 돈을 쏠랑쏠랑 주니까 덥썩덥썩 받긴 하는데, 뭔가 '돈을 번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용돈을 받는 기분이다. 그냥 우리 집에 온 이웃 손님이 반가워서 커피를 내려주며 손님 대접을 하고, 친구가 된 손님은 나에게 용돈을 주고 가는 느낌. 이따가 맛있는 밥을 사 먹든지, 아니면 과자라도 사 먹으라고 주는 용돈. 나는 손님이 주신 용돈을 감사히 받는다.







  아침은 나에게 힘든 시간이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하면 침대는 나를 끌어당긴다. 이미 충분히 쉬었지만 나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다. '벌떡 일어난다'는 건 내 인생에 아직은 없는 말이다. 난 늘 알람이 울리고 난 후에도 짧게는 10분, 길게는 30~40분 동안 (아니, 어떤 때는 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는다. 다시 잠이 들지는 않는다.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 어쩜 그렇게 일어나기 싫은지.


  그 전에는 이 '일어나기 싫다'가 '학교 가기 싫다' 혹은 '회사 가기 싫다'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게 학교 가기 싫어서 혹은 회사 가기 싫어서 그런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좀 다르다. 난 그냥 단순히 '일어나기 싫다'. 침대에 들러붙은 나는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일어나야 하는데. 얼른 일어나서 카페에 가야 하는데. 카페에 가고 싶은데.'


  그럼에도 나는 아침형 인간을 추구한다. 언제쯤 진정한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악착같이 아침형 인간처럼 산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쉬고 있을 때에도 앛미 6시~7시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기어 나와 운동을 했다.

  빅토르 위고는 "매일 아침 하루 일과를 계획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극도로 바쁜 미로 같은 삶 속에서 자신을 안내할 한 올의 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계획 없이 우발적으로 시간을 보낸다면, 무질서가 곧 삶을 지배할 것이다"라고 말했다지만, 나는 뭐 이런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아침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침이 참 힘들지만, 그 아침을 분주히 보내는 게 그냥 기분이 좋고 뿌듯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을 주로 아침에 몰아서 다 하는 편이다. 아침형 인간이 아니지만, 아침을 가장 바쁘게 보낸다.

 

  아침 8시 30분에 가게 문을 열려면 7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알람은 6시 50분에 맞춰놓았다. 하지만 그 시간에 딱 일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알람이 울리면 조금 더 침대에 붙어있다가 헐레벌떡 씻고 허둥지둥 가게에 간다. 어서 가고 싶은 내 가게.

 

  가게에 도착하면 가장 바쁜 아침을 보낸다. 완전히 잠이 깨지 않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몸도 찌뿌둥하다. 스트레칭을 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다. 난 이미 늦었다. 나는 항상 늦고, (아침형 인간을 추구하는 까닭에) 할 일은 많다. 오픈 준비는 물론, 테라스에 테이블도 꺼내놓고, 원두도 볶아야 하고, 디저트 재료 준비랑, 재고 상태 확인해서 주문도 미리 해놓고, 화분에 물도 주고, 그러는 중간중간 손님이 오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려주고... 드디어 일이 끝나면 11시쯤이 된다. 그러면 나는 좀 의자에 앉아 잠깐 멍하니 있는 시간을 갖는데, 그렇게 조금 있으면 이제 낮 알바생이 도착한다. 점심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원두를 볶는 일은 오후에 해도 된다. 그것 말고도 몇몇 일들은 굳이 아침에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나는 굳이 아침에 한다. 스트레칭할 여유 없이, 잠시 앉아 한숨 돌릴 틈 없이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면서 휘몰아치며 일하는 아침을 보내고 나면, 나는 뿌듯해진다. 이후 알바생을 기다리며 잠시 앉아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실 때가 나에게는 선물 같은 시간이다. 아, 나의 카페. 오늘 아침도 대단했어. 카페 하길 잘했지.  


  알바생이 있는 시간은 내가 딱히 할 일이 없다. 아침에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다 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게 무슨 복인지, 우리 알바생들이 하나같이 부지런 떠는 알바생들인 덕분이다. 도대체가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계속 돌아다니면서 걸레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대와 컵홀더를 채워 넣는다.

  나는 가만히 앉아 손님을 만난다. 주문을 받고 손님과 노닥거리고 있으면 옆에서 우리 알바생이 최선을 다해 커피를 내린다. 손님이 나가면 알바생은 또 돌아다니며 걸레질을 하고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한다. 나는 노트북을 켜놓고, 책을 보고, 글을 끄적거린다. 아, 나의 카페. 나는 카페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정말 좋다.


  10시에 마감을 하고 뒷정리를 하고 집에 오면 밤 11시쯤이 된다. 저녁 알바생에게 맡겨놓고 퇴근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조금 일찍 9시쯤 퇴근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12시간 이상 가게에서 보내는 나의 스케줄에 주위 사람들은 걱정이 많다. 힘들어서 어떡하냐면서. (여기서 '힘들다'는 말은 '돈을 못 벌어서 힘들다'가 아니라 '신체적으로 힘들다'는 의미가 맞다.) 나는 물론 피곤하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침대가 나를 붙잡아 늘어지지만, 그래도 나는 '어서 가게에 가야지! 내 가게에 가야지!' 하며 몸을 일으켜 또 하루를 보낸다. 일어나긴 싫지만, 일하기 싫은 것은 아니다. 나는 어서 내 카페에 가고 싶다.


  나는 내가 좋아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 후다닥 출근하고,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을 하고, 밤늦게 퇴근한다. 사람들은 자꾸 내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루 온종일 가게 문을 연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좋아서 하루 온종일 가게에 나와 있는다. 사람들은 자꾸 내가 인건비를 아끼려고, 혹은 알바생이 못 미더워서 어디 외출도 안 하고 하루 온종일 카페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서 가게에서 하루 온종일 시간을 보낸다.


  손님이 오면 손님과 알콩달콩 노닥거리고 정성껏 커피를 드린다. 그러면 손님은 나에게 용돈 같은 커피값을 준다. 난 감사히 받는다. 여기에 경제논리는 없다. 돈 버는 건 뒷전인, 나는 카페 사장이다.




  나도 이제 경제 용어로 말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의 말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철저히 내 방식이다. 나는 내 방식대로 이 세상의 경제 용어를 이용해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 옆 가게 사장님이 "저쪽에 또 카페가 들어오네요."라고 하시길래 "네, 인테리어가 예쁘게 되었더라고요"라고 했다. 옆 가게 사장님은 혀를 끌끌 차며 아니, 지금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잘되어야 하는데..."라고 하셨다. 나는 '우리'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다. "같이 잘 되면 좋죠!" 옆 가게 사장님은 한숨을 푹 내쉬셨다.


  또 다른 옆 가게 사장님은 "요즘 카페에 계속 손님이 많이 드나드는 것 같던데요!"라고 하시길래 "네^^ 제가 그랬잖아요. 점점 좋아질 거라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좋은 날들이에요!"라고 했다. "요즘 좀 어때요?"라는 질문에는 "조금씩 계속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말은 '돈을 많이 번다'는 말이지만, 나는 '그냥 좋다'는 의미로 말한다.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카페에 하염없이 앉아있어도 좋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니며 일하는 것도 좋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 퇴근길 서둘러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나는 커피를 볶고, 화분에 물을 주고, 냉장고에 우유를 채워 넣고, 책을 보고, 손님을 만난다. 좋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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