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좀 알 것 같다. 이제야 좀 트인다.
그렇게 마무리된 첫 1년.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제대로 정신줄 잡지 못했다면 아마도 지금의 저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만큼 가장 어렵고 힘들었지만, 절실했고, 어학시절을 포함한 독일 생활 전체에 있어서 가장 큰 변곡점이 아니었나 생각을 합니다. 힘들었던 만큼 무언가 제 안에서부터, 내면에서부터 변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결국에는 그 결과를 낼 수 있었으니까 말이죠.
그리고 독일 석사 첫 1년이 지나고 2년 차가 마무리되면서 새로운 변곡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사실 실제로 변한 건 없었습니다. 다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앞서 저질러놓았던 것들을 끊어내고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심적으로 큰 안정을 주었습니다. 바로 대학원 과정의 공식 명칭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제가 입학허가를 받을 때 저의 석사 전공은 Konstruktiver Ingenieurbau였습니다. 직역하면 구조공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국에서 이수했던 학사 과정의 커리큘럼과 비교했을 때 여기가 맞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Baumanagement라는 세부전공이 없었고 말이죠. 그러다가 2020년 Bauingenierwesen이라는 건축공학 혹은 토목공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Vertiefung으로 해서 세부 전공을 정할 수 있도록 변경이 된 것입니다. 이게 저에게는 정말 신의 한 수, 하늘에서 내려 준 빛이었죠.
바뀌는 것은 딱 하나. 공식 명칭이었습니다. 물론 공식 명칭이 바뀌기에 새롭게 석사 지원을 하고, 새로운 입학 허가를 받는 절차가 있었죠. 하지만 이미 같은 전공으로 입학 허가를 받아봤기 때문에 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세부전공으로 건축매니지먼트를 듣기 위해서는 학사 과정의 수업 하나를 1년 이내로 이수하라는 조건이 하나 생겼다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게 동일했습니다. 더욱이 많이 이수하지는 못했지만 첫 2년간 이수했던 수업들도 그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은 하나도 없었죠.
더불어 건축구조, 콘크리트 역학, 유한요소해석 같은 이론적이고 기술 중심의 과목에 파묻혀 숨이 막히던 저에게 "프로젝트 관리|, "계약 관리", "디지털 건설(BIM)" 같은 수업 목록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설레는 단어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공부에 더 가까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설렘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저에게 소중했던 것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었다고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이제 그 지긋지긋한 Anhörung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4학기 내내 노란 봉투를 학기 끝날 때마다 받다 보니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습니다. 이 봉투 하나가 주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생각보다 작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끊어낼 수 있다니!!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년, 그러니까 4학기를 지내면서 한 학기에 최소 15LP, 한 과목에 일반적으로 6LP로 구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한 학기에 최소 3개의 수업을 이수하여야 하는데요, 이제 한 학기에 3개 수업 이수하는 것은 여전히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능한 수준까지 올랐기 때문이죠. 더 많은 과목을 이수한 적도 있었고 말이죠. 하지만 앞선 4학기에 많이 이수하지 못했기에 오는 페널티가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자처럼 말이죠. 그동안 누적된 학점 부족은 마치 학자금 대출의 이자처럼 따라붙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한 학기에 15LP를 획득해야 하는데, 이게 한 학기가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누적이 됩니다. 최소 2 학기에는 총 30LP를, 4학기에는 총 60LP를 모아야 하는데요, 한 학기에 15LP를 획득하고 이수하는 것은 무리가 되지 않았지만 앞서 획득하지 못했던 LP들을 채워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매 학기가 끝날 때마다 그만큼을 다 이수하지 못해서 상담에 불려 갔던 것이죠.
이게 큰 위기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자존감을 깎아내리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번 학기도 성공적으로 고생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번 학기도 다 해내지 못했구나라는 결과물을 받아 들면서 자존감이 매 학기마다 깎이는 것이죠.
이 악순환의 굴레를 이제야 떨쳐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전공 과정 공식 명칭의 변화는 제게 단지 ‘행정적 정리’가 아닌, 정체되어 있던 삶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신호처럼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게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요? 아니,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잡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3년 차가 되니 이제야 좀 알 것 같다는 것도 남은 석사 수업을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독일어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발표를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위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닌 진짜 제 공부를 말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다 보니, 첫 학기에 저를 가장 힘들게 했던 조별과제에서도 제 몫을 해내게 되고, 때로는 이끌기도 했습니다. 독일어는 좀 부족하더라도 PPT 하나는 또 끝장나게 만드니까요? 그렇게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기여를 하고, 조원들의 도움도 받아가며 함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천천히 나아간 저는, 일반적으로 4학기 만에 끝내는 석사 과정을 남들보다는 늦었지만, 묵묵하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논문으로 획득하는 30LP를 제외한 90LP을 모두 회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초모듈과 핵심모듈, 선택모듈까지. 한국에서 학사 때 이미 배웠고, 실무에서 자주 접했던 부분이라 익숙했던 내용도 있었고, 건축매니지먼트라는 세부전공을 택하며 새롭게 배워보고 싶었던 수업도 있었으며, 처음엔 관심조차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끌려 선택한 과목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총 15개의 수업을 마치며, 제 석사 생활은 마침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2018년 시작했던 석사 생활은 2021년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과 2021년 사이, 전 세계를 덮친 거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COVID-19.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이 팬데믹은 제 대학 생활에도, 그리고 제 삶의 방식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갑작스레 닥친 변화와 고립, 그리고 불확실성은 분명 힘든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저는 뜻밖의 기회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가장 어려웠던 시간이, 돌아보면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도 하니까요. COVID-19는 분명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고, 그 변화는 저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게 COVID-19는 단지 위기만이 아닌, 또 다른 기회의 문이 되어 주었습니다.
조금은 갇혀 있었고, 옛것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해왔던 독일의 대학교 시스템이 COVID 19와 함께 어떻게 변화를 하였을까요? 그리고 이 COVID 19는 저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