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권수 Dec 04. 2018

타인을 너무 의식하는 나를 넘어서

누리고 음미하는 삶을 위해서는 타인의 시선을 필터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많은 부분 우리는 타인에게 비친 모습을 통해 자신을 개념화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의식하면서 더 나은 사람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행동할 동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할 때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와 갈등이 심하고 개인의 행복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득실을 분명히 따져 봐야 할 문제다. 너무 타인을 의식할 때 나타나는 진짜 문제는 '내가 바라는 나'를 찾는데 맹인이 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타인에게 맞추려고 노력할수록 초라해지고 공허함이 늘어난다.  


사실 타인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생각보다 그럴 여력이 없다. 단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신의 착각이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입기 민망할 정도로 눈에 튀는 티셔츠를 입고 돌아다녔는데 그를 만났던 친구 중 그 옷을 기억하는 사람은 8%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옷을 입고 다닌 학생은 48%가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고 답했다.  국내의 EBS 다큐프라임의 '인간의 두 얼굴'에서도 같은 실험을 했지만 거의 같은 반응들이었다. 심지어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바뀌고 진료실에서 눈 앞에 의사가 바뀌어도 많은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상은 자신에게 그리 신경 쓰지 않는데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향 탓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패턴에 얽매이는 것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많은 부분이 착시이며 그것은 내 생각일 뿐일 때가 많다. 타인에게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잘 보였을 때 자신의 일이 순조로울 수 있다는 무의식적 기대감과 통제 본능이 만들어 낸 착각일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생각이 만들어지면  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그 생각에 끼워 맞추듯 상황의 정보를 재조합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 된다. 그 사실에 맞춰서 사람들은 행동한다. 착각에 맞춰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타인을 의식하는 것은 터널과 같아서 다른 것을 보기도 힘들고 빠져나오기도 힘들다. 인간의 자기중심성과 착각 때문에 어디서 학습한 것도 아닌데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 같고 그래야 하는 무의식적인 중압감을 벗어나기가 힘든다. 그래서 좀 더 공허하지 않고 자유롭고 자신의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런 무의식적인 패턴을 벗어나려는 패턴을 만들어야 한다. 용기도 필요하고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필터링하는 반복된 노력이 필요하다. 


스티브 잡스는 죽음을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당신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타인의 생각과 결과물에 불과한 도그마에 얽매이지 말고, 타인의 견해가 당신의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라"라고 부탁한다. 위대한 삶이건 촌부의 삶이건 한 사람에겐 소중한 순간이고 한정된 삶임에는 다를 바 없다. 타인을 의식하며 살수 밖에 없지만 그것이 타인을 공감하는 정도를 벗어나 자신의 삶과 행복을 침해하지 않도록 경계할 책임은 스스로에게 있다. 



A, B, C 중에서 오른쪽의  X 길이와 같은 것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B다. 하지만 총 7명의 실험자 가운데 6명이 A라고 답하자 마지막 한 명은 당황해하면서도 A라고 답했다(EBS 다큐프라임의 ‘인간의 두 얼굴’). 실험 대상자의 70%가 이렇게 거짓을 답했다고 한다. 타인의 시선이 한 명을 바보로 만들기는 이렇게 쉽다. 우리의 인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하는 심리고 이를 통해 만들어지는 행동과 일상을 설명한다. 당연히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B를 A라고 말하다 보면 A가 진짜 정답이 되게 된다. 그러니 이런 관성을 끊어 낼 용기가 필요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팔러 간다. 그들은 당나귀에 아무것도 싣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길을 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아버지와 아들에게 말을 한다. 

1. 당나귀를 써먹지 않을 거면 왜 먹이를 주는 거요! 당나귀야 튼튼하고 건강하니 그 위에 탄다고 무슨 문제가 있오!...... --> 아버지는 아들을 태우고 자기는 걸었다. 


2. 한참을 가다가 다시 사람들이 웅성 인다. 세상 말세요! 사냥개보다 더 잘 뛸 수 있는 젊은 녀석이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는 걷다니 자식 교육을 잘못했다!....--> 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 아들은 그 뒤를 따른다. 


3. 가다가 또 나그네를 만난다. 원 세상에.. 무슨 아버지가 저리도 매정 하담! 둘 다 태워도 끄떡없는 당나귀를 혼자서 타고 가다니.. 아들보다 당나귀를 더 귀하게 여기는 모양이군. 이 더위에 아들이 일사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아버지는 아들과 당나귀에 함께 태우고 갔다. 


4. 당연히 당나귀에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탄 것을 보고.. 별꼴이야 당나귀 한 마리에 장정 둘이 타고 가다니.. 저 가련한 당나귀가 고개도 돌리지 못하잖아.. 당나귀가 죽어야 적성이 풀릴 사람들이구먼..--> 당나귀가 지켜서 죽으면 안 되니 막대기에 당나귀 다리를 묶어 들고 가자꾸나.. 그러면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이 많다고 칭찬도 하고..


당나귀를 매고 가던 아버지와 아들을 동네 사람들은 뭐 저런 바보들이 있냐고 비웃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당나귀를 매고 있던 장대가 부러져 당나귀는 강물에 떨어지고 떠내려갔다. 아버지는 남의 말을 듣다가 이지경이 되었구나 하고 한탄을 했다는 이솝 우와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면 영원히 그 사람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노자는 말한다.  타인을 의식하고 타인의 말에 신경 쓰고 있는 자신에게 늘 질문해야 한다. 내가 타인의 감옥에 있는 것은 아니지... 


타인을 합리적으로 의식하려면 일단 우리의 무의식부터 점검해야 할지 모르겠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으면 왠지 불편함 감정, 이런 것에서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그 불안함은 합리성보다는 많은 부분 문화적 유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의 왼쪽 그림에서 위, 아래 중에서 어느 쪽이 앞쪽일까? 또 오른쪽 그림에서 가운데 꽃 그림과 같은 그룹은 A일까? B일까? EBS 다큐프라임 '동과 서'에 보면 이런 다양한 실험들이 나온다. 동양은 관계성을 중시하고 서양은 개체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왼쪽 그림에서 동양 사람들은 주로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아래쪽이 앞이라고 생각한다. 오른쪽 그림에서 전체적인 모양이 그래도 비슷한 점이 많은 A를 동양사람들은 선택한다. 서양 사람들은 진한 줄기가 개체적 특성이 동일한 B를 선택한다. 


좋고 싫고, 옳고 그름을 떠나 동서는 무의식 속에 녹아 있는 관점이 조금은 다르다. 우리는 이런 경향적 무의식에 영향을 받으며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낀다. 관계를 중시하는 동양의 관점과 국민적 단합과 일체성을 통해 급속도의 발전을 이루어야 했던 우리의 형편이 '타인을 의식하는 중력'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지 고려해야 한다.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한국인에게는 더 크게 다가오는 듯하다. 미국의 어머니는 절대적 이익에 반응하지만 한국의 어머니는 상대적 이익에 반응한다. ‘마더 쇼크’라는 다큐멘터리의 실험 결과 이야기다. 우리 뇌에는 즐거움이나 이익을 얻게 되면 반응하는 보상회로가 활성화되는데 그 중심에 측핵이라는 곳이 있다. 그런데 한국의 엄마와 미국의 엄마는 이곳이 다르게 활성화되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엄마는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았다면 이곳이 활성화되는데 한국의 엄마는 좋은 성적 자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해서 잘했을 때 활성화되더라는 것이다. 비교에 민감한 뇌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객관적인 사실이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 것보다는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고 타인과 비교해서 자신이 어떻게 평가되는 것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스템이다. 우리의 뇌는 타인을 의식하며 비교할 때 보다 안정적인다는 정보와 보다 즐겁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고 뇌의 한 측면이 '나' 자신이 될 수는 없다. 내 선택의 결과가 되지 못한다. 그저 타인의 의식하고 쫓는 무의식적 방향을 좀 더 이해하면 족하다.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은  '타인 의식하기'를 이해하면 내 삶을 위한 자신의 선택이 명료해진다. 나에게 대한 위로와 지지도 선명해진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정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진다. 누리고 음미하는 자신의 삶의 위한 지혜!



이전 07화 감각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