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명약

관계의 기본, 인정에 관하여

by 장동혁

* 1989년 아프가니스탄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그때의 1분이 가장 긴 시간처럼 느껴지곤 한다.
매초가 영원 같았다.

(아버지) 바바는 계속 날 내려다보면서도 끝내 읽어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나를 구해준 것은 라힘 칸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가식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미르 잔 이리 주렴. 정말 읽어보고 싶구나 “
바바는 나를 부를 때 잔이라는 호칭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래, 그걸 라힘 아저씨에게 드려라. 나는 준비하러 위층으로 가마“

그 순간에는 내 몸속의 혈관을 모두 열고서 그에게 물려받은 피를 모두 쏟아버리고 싶었다.”
-연을 쫓는 소년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행동 하나만 고른다면?


아마도 사랑을 가장 먼저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나 사랑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다. 다음으로 소통, 공감 등이 나올 것 같다. 이 또한 중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막연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열심히 소통하고 있는데 상대는 취조당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인정(認定)'을 택한다.


인정은 관계의 기본이자 명약이다.

인정만 잘하면 갈등을 피할 수도 있고 틀어진 관계를 되돌릴 수도 있다. 상대를 내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는 주정당할 때 분노한다.

아내로서, 아들로서, 상사로서, 때로는 고객으로서.


가족 행사가 있는데 다 결정된 뒤에 듣는다면 어떻겠는가. 아마 무척 서운할 것이다. 가족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분노와 서운함이 올라올 것이다. 그리고 관계는 소원해질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가족인 아버지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해 고통과 괴로움을 겪는 한 소년이 있다.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의 주인공 아밀이다.


이슬람 국가인 데다 부족 국가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아프가니스탄은 보수적 경향이 강하다. 그런 나라일수록 가문을 이어갈 장자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다. 그래서 장자에 쏟는 애정과 관심은 다른 형제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장치 가문을 이어갈 장자이자 독자인 아밀은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을 독차지하지 못해 늘 괴롭다.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동갑내기 하인인 하산을 자신과 차이를 두지 않고 대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둘은 엄연히 신분과 정체성이 다른데도 말이다.


무엇을 사든 지 하산의 몫을 챙겼다. 더군다나 하산은 자기가 가지지 못한 능력까지 가져 질투심까지 더해진다. 아버지의 인정을 차지하려 고군분투하는 소년의 심정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아마 어린 아들이 아닌 부인이 그런 취급을 받았다면 집안이 몇 번 뒤집어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아밀은 하산에게 해서는 안될 몹쓸 짓까지 하게 된다.



우리 사회도 인정보다는 부정이 넘쳐난다. 시간이 되어도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에게 "오늘 월요일이라 학원 가기 싫구나" 또는 "오늘은 엄마와 좀 더 같이 있고 싶구나"라며 감정을 인정해주는 부모는 흔치 않은 것 같다. 그 아이의 감정은 부정당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의 낮은 행복지수 원인을 여기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인정이란 있는 상대를 그대로 읽어주는 거다. 정체성을, 감정을, 욕구를 말이다. 부부싸움하며 “당신 지금 나 때문에 많이 속상하구나” 한마디면 될 걸, 그걸 안 해 화를 키운다. 감정에 눈이 가려 상대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아니 뻔히 보여도 하고 싶지가 않다. 져서는 안 된다는 승-패의 환상에 빠져 있을 때다.


내 실수로 인해 상대 운전자가 놀랐다면 비상등을 네 번 깜빡여주면 된다(미안해요!). 아니 두 번이라도 좋다(쏘리!). 그 깜빡이에는 당신이 나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임을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인정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인간이 탄생하는 순간 얻게 될 정체성은 생명체다. 살아서 존재해야 하고 축복받아야 할 생명체가 부당한 이유로 부정당하기도 한다. 이어서 갖게 되는 정체성이 ‘성(性)’이다. 과거, 학수고대하던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정체성을 부정당했던가. 평생 따라다닐 이름마저 부정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을 인정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칭찬과 인정은 엄연히 다르다. 칭찬은 평가의 결과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평가 말이다. “역시 우리 아들 최고야”, “김대리 정말 대단해!” “엄지 척!”은 인정이라기보다는 칭찬에 가깝다. 기준에 부합하면 칭찬이 따르지만 반대일 경우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칭찬 뒤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비난이 도사리고 있다. 칭찬이 부담스럽고 불편한 이유다.




어려서부터 인정을 받고 자란 아이가 건강하다. 그런 아이가 자신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충실하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 자신의 감정 상태가 어떤지 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


‘인정 경제학’, ‘인정 통장’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인정은 중요하다. 또한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인정의 상호 교환도 중요하다. 인정을 받기만 하고 돌려주지 않으면 균형이 무너지고 관계는 깨지고 만다. 우리는 늘 인정 잔고를 확인하며 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어린 시절 생긴 인정의 공백은 성인이 되어 매우기란 쉽지 않다. 그 안에 깊고 거대한 인정 공백이 자리잡고 있는 사람은 늘 인정의 욕구에 시달리며, 어딜 가든 자신을 봐달라고 보채는 통에 함께 있는 사람들까지 피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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