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치에 대하여

by 힙스터보살


요 근래가 노벨상 발표시즌이라 기사에 이러저러한 수상자의 이름이 나온다. 그렇게 2025년 노벨물리학상은 아니나 다를까 양자역학을 연구하신 물리학자에게 돌아갔다. 이미 과학 유투브나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양자역학을 다루고 있다지마는, 들어도 뭔 말인지 잘 이해가지 않는 건 여전하다. 그런에도 불구하고 내 나름대로는 아주 조금씩 주워 먹듯이 양자역학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감각을 다져나가고는 있다.


양자역학은 아주 작은 세계를 다룬다. 양자역학에서는 고전역학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물리적인 특이현상도 발견된다. 학문적으로 양자역학이 무엇이라고 이 자리에서 기술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마는, 어찌되었든 양자역학의 특징은 내 인생에 영감을 주곤했다. 그 중에 한가지가 '중첩성'이다. 현실의 세계에서는 'All or nothing'이라는 관점이 있지만, 양자 세계에서는 '0이면서 1이 동시에 존재함'이 가능하다. 이를 가리켜 중첩되었다 한다. (그래서 양자역학적 뒤죽박죽함을 끼얹어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라는 영화가 나온 걸지도?!)


그런데 생각 해보면 그렇다. 양자의 세계는 미시세계를 다루지 않던가? 우주의 스케일에서 보면 인간은 너무나도 작은 존재다. 우주덕후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Pare blue dot>이라는 사진은, 지구는 광활한 우주에 보잘것없는 작은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 작은 지구에 기생하듯 살고있는 인간은 얼마나 더없이 작은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양자적인 특징이 인간의 삶에서 발현된다 한들 이상하지 않지 않을까!?



Google image에서 건진 <Pale blue dot> 이미지. 우주의 관점에서는 지구조차 점일 뿐이다. 그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서로 상충하는 듯한 관점을 한 번에 수용하는 것이 적잖이 버거웠다. 각자의 관점은 각자 타당한데, 이 둘이 공존하게 되면 '어 이게 뭐야?!'싶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 인간은 믿음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 v.s. 인간이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 인간은 꿈과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다 v.s. 인간은 지극히 현실을 깨닫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 역사는 뛰어난 개인에 의해 발전한다 v.s. 그 인물이 아니더라도 역사의 큰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 사람은 노력을 통해 자기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 v.s. 인생은 운빨이 대부분이다

-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v.s. 인간이 더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는 저 명제들의 대립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내 사고방식이 습관처럼 남아서 얼핏 느끼기에는 저런 대립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겠다. 내가 저 명제들의 대립이 모순적으로 느낀 데에는 '한 가지만 맞다'는 사고를 전제로 했음을. 진리는 밤하늘의 별만큼 많기에 나라는 그릇이 그 무수함의 일부라도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커져야 함을. 이미 각각의 주장은 옳다. 그 옳은 주장이 너무 많아서 진절머리가 쳐질 정도로 많다. 하나가 옳다고 하여 나머지가 그른 것도 아니다. 0이자 1인 상황은 우리의 삶에 공기와 같이 함께하고 있다. 다만 인간은 생각을 깊고 넓게 하는 것을 썩 즐기지 않는 존재인지라 지금 무엇이 적합한지 어느 정도 답을 갖고 살아가고자 한다. 때문에 생략된 진리는 '틀리다'고 치부하고 선택한 진리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창한다.


변화하는 환경과 더불어 선택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야만 한다'는 아상(我相, 참다운 무엇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에 사로잡히면 필히 불편감이 생긴다. 이미 붓다께서 말씀하셨듯 아상이 강할 수록 괴로움은 커진다. 현실은 변하고 그 때 당시에는 적합했던 판단이 지금은 아닐 수도 있다. 현실과의 괴리만큼 우리는 감각적 고통을 느낀다. (= 다시 말 해 고통은 내가 진리에서 괴리되었음을 아주 손쉽게 느낄 수 있는 바로미터) 감각은 너무 직관적인 판단시스템이라 오류 가능성이 적잖이 있어서 이성을 통해 보정작업을 거친다. 감정과 이성의 관계는 대립이 아니다. 서로 보완하면서 좀 더 온전하게 세상을 인지하기 위한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도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런 상황을 마주한다 : '당신은 감정적인 사람이군요'라며 흥분한 상대방을 까내리는 상황을. 이는 감정이란 이성보다 못하다는 어떤 위계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언이다. 감정(or 감각)은 이성으로서는 짚지 못할 미묘한 상황의 변화를 감지해내는 꽤 효과적인 감지시스템이다. 때문에 지금 현 상황에서 옳고 그름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야만적인 취급하는 데에는 약간의 경계가 필요하다. 앞 뒤 가리지 않고 감정적인 사람은 배제하고 (그정도로 제멋대로이면 그건 병이다) 평상시에는 꽤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자가 특정 사안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한다면 그게 왜 분노를 일으키는지를 고찰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때문에 공분하는 시민을 레밍 취급 해서는 아니될 것이며, 지금 발생하는 현상 자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이 필요할 뿐이다.



This is the world we living in. Even if we have vulnerabilities, life is worthwhile.



하지만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면 우리는 도무지 판단을 할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평등하다고 하여 내 존재의 중요성을 지우게 되면, 상황에 따라 나는 내 자신을 보전하지 못하는 모순에 이르기도 한다. 필연적으로 맞딱뜨릴 모순을 알면서도 나름의 논리를 세워나가는 용기를 내야 하는 상황도 있고.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는 세상에서 무어인가를 주장하는 때에는 겸손과 당당함이 뒤섞일 필요가 있는 것같다. 반대로 상대방의 가열찬 주장에는 필히 헛점이 있음을 알되, 그 헛점을 공격을 위해 쓰지 말고(즉, 이겨먹으려고 하지 말고) 전체적인 맥락에 맞추어 적합도를 판별하는 게 우선일 것이다. 그게 공론장의 혼탁함을 줄이면서도 집단지성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는 효율을 높이는 방법인 것같다.


때문에 내 마음속에서 붓다의 말씀이 다시금 빛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생각하건데 적합한 것이 무엇인가. 한자로 바뀌어 말하면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정답이 없을지언정 답을 찾아 용기를 내어 걸음을 이어나가고, 맞딱뜰이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답을 일단 정하고, 그에 기반하여 그 다음 스텝을 가보아라. 어찌보면 참 고단한 과정이다. 하지만 또 달리 보면 이 세상에 정답이 없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자유 여기에 있다.


인생의 고통스러움, 공부의 고통스러움은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정해지지 않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정해나가는 일에 품이 드는 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0에서 1까지 가는 게 이렇게 힘듭니다 여러분!) 하지만 그렇게 품을 들이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진리들이 있지 않은가. 어차피 죽음으로 맺을 인생 그렇게 열심히 진리를 찾으로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오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등산을 비판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등산을 직접 해보면 안다. 산을 오르는 과정동안 발견하게 되는 아름다운 꽃, 푸른 하늘, 쉼터의 소중함, 맑은 공기 등. 등산을 하는 동안 겪는 그 모든 것이 곧 등산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리네 사는 인생은 값어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면서 또한 값어치가 있다. 이 세상이 이와 같이 모순됨에도 자비와 사랑이 가치로운 건 다 이런 맥락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연재는 매주 수요일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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