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의 납치극 - 4

아이의 행방

by 작가 전우형

* 3편에서 이어집니다.


의구심


커피 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코 끝을 맴돈다. 손잡이로 전해진 은근한 온기가 교감신경을 자극한 탓인지 손등에서부터 자글자글한 소름이 돋아난다. 머그잔을 살짝 기울이며 입을 가까이 대어 본다. 약간의 포말을 머금은 미끈하고 부드러운 액체가 살짝 벌린 입술 틈으로 흘러들어와 혀를 포근하게 감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연인이 사랑의 밀어를 나누며 살갗을 비빌 때처럼 자극적이다. 잔잔한 미각에 더 깊이 빠져들고자 슬며시 눈을 감아본다.


캄캄한 어둠의 장막 뒤로 숨어버린 세상의 실루엣이 마치 그림자 연극처럼 명확한 존재감으로 그를 의도를 방해한다. 단색의 그림자 속에 의도적으로 담긴 수많은 의미들이 혈관주사처럼 즉각적으로 삶의 경계를 뚫고 제멋대로 밀려든다.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은 마음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최대한 젖힌다. 푹신한 촉감이 상반신의 후면부를 감싸며 지그시 압박을 가한다. 마치 '너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어'라고 말하며 다시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것처럼.


흔해빠진 기억은 낡은 영사기로 재생되지 않는다. 현재의 안온함과는 대조적으로 사막을 횡단할 때처럼 텁텁하고 퍼석한 모래먼지가 호흡기를 에워싼 느낌이다. '어째서 내게 전화하지 않았던 걸까?'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스피커폰으로 대화할 때처럼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런 와중에도 주머니 끝으로 삐져나온 휴지조각처럼 미처 숨기지 못한 불안과 떨림이 묻어 있었다. '지금이라도 말해주는 게 나을까?' 그의 옆에는 막내 아이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이벤트


아이를 둘러맨 채 달아나는 남성을 다급히 뒤쫓은 아내였지만 따라잡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했다. 그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아내의 당황을 지켜보며 전화를 기다렸다. 전화가 걸려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잠시 더 놀린 후 이곳으로 불러 그녀와 아이의 생일파티를 해 줄 작정이었다. 케이크는 이미 카운터 한편에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한참의 시간이 흘러도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그는 아내의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지만 알지도 못한 채 부재만 외쳐대는 기계적인 여성의 목소리만 반복되는 상황이 감당하기 어려운 조바심을 제공했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아이가 납치됐는데 남편에게 전화하지 못할 사정이 무엇일지 쉽사리 떠올릴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사정이란 때때로 놀랄 만큼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떠올리는 것 자체가 터부시 되거나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을 상대가 뒤늦게라도 알아차린다면 자신의 지난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상대에게 자신이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 곰곰이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들이었다. 자신 또는 상대에 대한 진심 어린 실망은 관계에 치명적인 균열을 만들기 충분했기에 예측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 중 일부는 소설이나 드라마의 영역에서 그 결과를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손 닿지 않는 마음 저편에 묻어두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이로웠다. 그러고는 모든 가능성을 하나씩 헤아려본 뒤에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을 때야 비로소 의식의 수준으로 꺼내어볼 만한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설사 그런 생각을 초기에 염두에 두지 않은 탓에 누군가로부터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받더라도 가까운 사람에 대한 질 나쁜 의심은 나중의 상처를 차치하고서라도 현재의 삶을 갈가리 찢어놓기에 충분했다.


전화를 끊은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그는 부부관계에 해를 끼치지 않을 만한 '보편타당한 가능성'에 대해서 하나씩 퍼즐 조각을 맞추어보고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전화에서 아내가 보인 반응은 퍼즐 조각의 위치 단서를 제공하기는커녕 의구심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일찍 퇴근한다며 살짝 운을 뗐을 때 그녀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어색한 약속을 들먹이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평소답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당황시킨 걸까? '아이의 납치'라는 이벤트에 담긴 당초의 기획의도와는 전혀 다른 당황의 결이 그가 가진 모종의 불안을 자극했다. 털어놓고 의논해야 할 모두의 당황이 어째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혼자만의 당황이 되어버린 걸까?


지병


'막내의 납치를 숨겨야 하는 사정이 아내에게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막막함이 그의 명치끝을 묵직하게 압박해온다. 윙윙거리는 생각들이 손을 내저어도 털어지지 않고, 뱀 한 마리가 목을 친친 감아오며 의식을 아득히 밀어내는 것만 같다. 그는 재킷으로 손을 넣어 작은 약병 하나 꺼낸다.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열던 그는 그것을 테이블 아래로 떨어트리고 만다. 어렵사리 팔을 뻗어도 아무것도 손에 닿지 않고, 결국 체면 따위 따질 여력이 없는 듯 거칠게 테이블을 밀어낸 후 다급히 몸을 숙여 테이블 아래로 바짝 엎드린다. 바닥을 더듬다시피 하다가 가까스로 약병을 집어 든 그는 엎어진 모양 그대로 허겁지겁 뚜껑을 열어 약병에 든 것을 손바닥에 쏟아붓는다. 그중 몇 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도 어쩌지 못한 채 그는 캡슐 하나를 입 속으로 털어 넣기 바쁘다. 주저앉은 채 가쁜 호흡을 내쉬던 그의 안색이 점차 편안한 빛으로 돌아온다. 답답한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어헤칠 때와 같은 청량감이 그를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려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흩어진 캡슐을 주워 담은 뒤 소파에 앉아 주위를 살핀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제 막 벗어났음에도 그의 태도에는 급작스러운 공포나 공황, 놀라움보다는 그저 귀찮음과 번거로움 정도가 묻어있을 뿐이다. 잠깐의 소란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의 안색이 비교적 평안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면서도 표정과 눈빛은 희미한 실망을 말한다. 아이는 이만한 소란에도 잠이 깨지 않을 오후의 단잠에 취해있다. 쏟아진 커피를 정리하기 위해 다가온 카페 직원에게 새로운 커피를 주문한 그는 다시금 아까의 생각을 이어가 보려 노력한다. 뒤섞인 1000 pcs 퍼즐 조각처럼 의미를 알 수 없던 생각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갔다. '중요한 건 그녀가 왜 아이를 잃어버린 상황을 내게 말할 수 없는가에 대한 거야' 그리 오래 전은 아니었지만 일부러라도 쉽게 떠오르지 않을 곳에 밀어둔 기억 하나가 그의 뇌리를 스쳐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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