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죽을 끓이며

by 푸른향기

그새 또 잊었다

오랫동안 햇볕에 또글또글해졌을 팥

웬만해서는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 시간이란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어서

옹골지게 굳은 팥에게도 껴안았던

햇빛 다 풀어놓을 시간이 필요한 법

쉽게 해치울 욕심 놓아두고

약한 불로 되돌린다 그제야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는 팥알의 선

믹서에 마저 갈아 체에 거른다

헤쳐진 살 고루고루 퍼지게

잘 저어야 하는데 반죽 다듬는 사이

파르르 넘친다 아, 이 불 같은 성질

저어주지 않으면 밑이 타지고

위로는 부글부글 끓어오르고야 마는

천천히 천천히 있어야만

저 성질 온전히 풀어지는

압축된 열


가슴 데이며 펄떡대던

붉은 시간들 납작해진다




나는 팥죽을 좋아하지 않는다. 팥을 먹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고, 뱃속이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팥이 정장작용을 해서 장을 청소해준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맞지 않은 듯싶다. 그러나 식구들이 잘 먹는 편이라 가끔씩 하곤 했다.

팥죽을 끓이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팥을 물에 불려놓았다가 오랫동안 끓여서 믹서기에 간다. 믹서기에 갈지 않고 팥을 일일이 으깨서 체에 밭쳐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런 섬세한 정성을 기울이지는 못한다.

팥을 끓일 때는 마음을 차분히 먹고 해야 한다. 팥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뚜껑을 열고 약한 불로 되돌려서 천천히 익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건 팥 국물이 끓어 넘치고 거품이 솟아올라 잘못하면 가스레인지 주변이 엉망이 되기 때문이다. 콩을 삼을 때도 그렇지만 팥은 더욱 그렇다. 팥에게는 팥이 가지고 있는 단단한 열이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그건 오랜 시간 동안 팥죽을 끓이면서 얻어낸 깨달음과 같은 것이다.

팥꽃이 지고 나면 팥 열매는 단단해지면서 햇빛의 열을 안으로 안으로 다잡아 넣었을 것이므로 팥알 하나에는 햇빛 수억만 개가 응축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 팥이 붉은 건 그 열의 빛깔이라는 것, 그 빛깔은 귀신도 범접하지 못할 것이어서 옛날부터 악귀를 쫓는데 쓰였을 거라는 것...


결혼해서 남편과 참 많이도 싸웠다. 별일 아닌 것으로... 행주를 아무 데나 놓아두어서,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그지 않아서, 뜨거운 냄비 뚜껑을 뒤집지 않고 이동해서, 쓸개를 빼놓지 않고 매운탕을 끓여서, 옷을 아무 데나 걸어서... 한 번 싸우면 서로 말 안 하고 지내는 것으로 일주일을 버텼고 좀 심하면 한 달이 가기도 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불같이 싸웠을까... 싸움이 시들해진 요즘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겐 항상 '화'가 내재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팥알이 품고 있는 열처럼, 내 안에는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은 '화'라는 덩어리가 있었다. 그 덩어리에 성냥불을 당기듯 남편의 말 한마디가 잘못 와서 닿으면 마치 냄비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불길이 일어나곤 했다.


결혼생활이란 게 생각 같지 않아서, 내가 기대하고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서,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결혼이어서, 끊임없이 착한 여자를 강요하는 현실이어서, 마음먹은 것처럼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서, 나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 나의 조건이어서, 끊임없이 남을 의식하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나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체크해야 하는 것이라서, 남들은 당연한 모성애가 나에게는 평생을 걸고 완성해야 할 의무가 되어 있어서, '엄마'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밀고 나가야 하는 것이라서, 더욱이 한 번도 남편을 '신랑'이라고 불러보지 못한 나의 굳은 혀가 원망스러워서...


한번 끓어 넘쳐버린 화는 주워 담기 힘들었다.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었다. 남편의 미안하다는 말도 내가 너무 심했음을 알아차리는 것도 해결책은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흐르는 것, 그것이 최선이었다.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면 넘쳤던 화가 좀 가라앉았다. 마치 팥 앙금이 가라앉듯... 마치 그것은 억울하고 분해서 한참을 울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에는 어제의 울분이 많이 달래어진 기분과 같다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화'의 단단한 구석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져서 부드럽게 해 주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풀어주는 듯했다. 펄떡대던 시간들이 잠잠해지고 조용해짐은 오로지 시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이 많이도 흐른 지금, 내가 '화'라고 생각했던 것은 별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아간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별 것이 아니다. 나는 특별하다고, 나는 그러면 안된다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니 누가 봐도 괜찮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옭아매었던 생각이 오히려 괜찮지 않음을 불러일으켰음을 알아간다.


오늘 낮에는 밖에 나가 가을 맑은 햇빛을 마음껏 쐬어보자. 햇빛에 나를 그냥 놓아두어 보자, 그냥 햇빛이 흐르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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