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잘것없는 화가다.
그렇게 잘 팔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굶어 죽을 정도로 안 팔리는 화가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그리고 적당히 벌어서 적당히 살아가는 화가.
그게 지금의 내 위치이다.
나에게는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던 여자가 있었다.
내 첫사랑.
처음 그녀를 본 날을 수십 년이 지는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녀가 내 친구와 맺어진 그 날도 기억한다.
그와 그녀의 결혼식을 기념해서 나는 두 사람을 화폭에 담아 선물하였다.
그렇게 활짝 웃는 그녀를 나는 처음 보았다.
그리고 나는 오늘, 가장 슬픈 표정의 그녀를 그리고 있다.
내 친구는 무척 좋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마을 제일의 미녀인 그녀와 결혼할 수 있었다.
나도 그 녀석의 사람됨을 믿고 그녀를 후회 없이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녀석은 그녀를 두고 멀리 가버렸다.
바보 같은 녀석.
네가 없으면 그녀의 웃음은 누가 책임진단 말이냐.
검은 옷을 입고 상념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봐라.
네가 달래주지 않으면 누가 달래준단 말이냐.
그토록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이 수심으로 가득하다.
그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리자고 제안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에는 웃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녀는 수락했고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바람과 다르게 그녀는 그리는 내내 얼굴이 굳어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가능하다면 내가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싶다.
그녀 옆 벽난로 위의 깨진 화분이 그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까?
나에겐 그런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나?
초상화가 완성되면 청혼해볼까?
나는 수많은 나와 싸웠고 결국 포기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마지막 마음을 담아 나와 그녀를 한 폭의 그림 안에 넣었다.
이걸로 됐다.
이걸로 충분하다.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