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쟁과 데탕트가 결정적 계기
최근 읽은 책 "이상한 성공"에서 인상적인 부분 위주로 소개해 봅니다. 앞의 글을 못 읽은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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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및 해외 기구)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뤄졌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밀어붙인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스빈다(158쪽).
공산주의진영과 자본주의진영 간에 냉전이 1960년대 말부터 완화되는 '데탕트(Détente) 현상'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2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당시 중공)을 방문하고, 1971년 3월부터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습니다. 미국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한국과 동맹을 폐기할 수 있고, 한국의 적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은 물론 북한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감이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촉발시켰습니다(책 159쪽).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가방위에 필요한 무기를 자주적으로 개발해야했고, 이를 위해서는 철강, 비철금속, 전자, 기계, 조선, 화학산업을반드시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한국전쟁 이래 한국에서 안보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가치였으니까요. 대부분이 반대했던 중화학공업화를 권위주의 정권이 추진한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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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보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중화학공업 육성의 기반이 당시 한국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책 159쪽).
중화학공업화는 대규모 초기 설비투자를 감당할 수 있는 재벌 대기업이 존재해야 가능한 성장전략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일을 담당할 재벌 대기업이 1950년대 적산 불하로 이미 형성되어 있었죠. 하지만 재벌대기업의 존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인도네시아, 필리핀,태국, 말레이시아에도 한국의 재벌 대기업과 유사한 규모의 큰 기업들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 대기업처럼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할 기업은 거의 없었죠).
즉, 중화학공업화는 재벌 대기업의 존재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 그 재벌 대기업이 위험을 무릅쓰고 새로운 투자에 나서게끔 제도적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강제할 국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1970년대 초에 시작된 중화학공업화는 '그 당시 국제질서'에서 한국이니까 선택할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즉 이전에 소개했던 책, 아시아의 힘("아시아의 힘6 - 당근과 채찍을 활용한 제조업 육성")에서 말씀드린 강력한 '채찍'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적을 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대출자금이 회수당하는 것은 물론, 기업 경영권을 바로 빼앗아 버리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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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정희 정부가 제시한 당근이 매우 달콤했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입니다. '8.3조치'를 다룬 글("한국의 경제위기와 극복 - '8.3 사채동결' 조치")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시장 균형 수준보다 낮게 제공된 금리는 기업과 사주에게 큰 도움이 되었죠.
그리고 아래 <표 3-1>에 소개된 바와 같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 골고루 낮은 소득을 받게 만드는 강력한 저임금 정책도 기업들의 실적을 개선시키고.. 또 중화학공업에 투자할 재원을 만드는 데 기여했습니다.
<표 3-1> 기업 규모별 관리직과 생산직 노동자들의 상대 임금 추이(500인 이상 대기업 = 100)
출처: "복지의 원리",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