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주는 어떻게 50배 상승했다 1/3토막 났나?
예전 읽었던 책, "한국의 유가증권 100년사"의 내용을 소개하는 중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70년대 후반에 발생했던 이른바 '건설주 파동'에 대해 살펴봅니다. 혹시 지난 번 글을 못 본 분들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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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 동결 이후 정부는 적극적인 상장 촉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대신 대주주들에게 '경영권 보호'라는 당근도 제시했죠(339쪽).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1976년 12월에「증권거래법」이 개정되었다. 1976년의 제7차 개정은 이전과 비교할 때 대폭적이고 전면적인 개정이었다. 개정된 법의 주된 내용은 ① 외형적으로 계속 확대되어 갈 증권시장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체제로서 증권관리위원회와 증권감독원의 설립, ② 기업의 안정 경영권에 대한 위협이 기업공개 저해요인의 하나이므로 실질적인 기업공개를 유도할 안정경 영권의 확보, ③ 증권시장의 공신력을 높이고 기업부실화를 막기 위한 상장법인의 사후관리 강화, ④ 투자자가 기업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여 투자할 수 있도록 기업공시제도의 보완, ⑤ 소액주주를 보호하고 내부자거래를 막기 위한 공정거래기반의 확립이었다.
저는 여기서 ②번 항목이 가장 눈에 띕니다. 기업으로의 자금 공급원으로 주식시장을 지목하고, 상장을 촉진한 만큼 경영권도 보호해주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와 같은 정부의 의도는 이후 한국 주식시장의 기본 체질을 '주주 홀대 경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저평가된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투자 성과를 올리는 전략을 소개한 책 "딥밸류"를 보면, 어떤 과정을 거쳐 미국 내 저평가주식들이 제 값을 받게 되었는지 잘 나옵니다. 1976년 칼 아이칸(행동주의 펀드의 창시자)은 투자자들에게 배포한 안내서에서 자신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책 32~33쪽).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미국 기업의 청산가치(=순자산가치)가 눈에 띄게 상승했지만, 보통주의 시장 가격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제대로 대응하기만 한다면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특별한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중략)
자산이 많은 기업의 경영진은 자기 회사 주식이 적으며, 회사를 팔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의 (적대적 M&A) 침략을 물리칠 생각으로 회사 주위에 '만리장성'을 구축해 자신들의 특권을 철저히 보호합니다. (중략) 우리들은 저평가된 주식을 의미 있게 매입한 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해당 기업의 운명을 지배해 이익을 얻을 것입니다.
1) 경영진을 설득해 백기사(경영진에게 우호적인 세력)에게 매각하도록 한다
2) 대리전을 벌인다
3) 공개매수(tender offer, 불특정 다수로부터 주식을 집단적으로 매수하는 일)을 제안한
4) 보유 지분을 회사에 매각한다
이상의 내용은 '아이칸 선언'이라고 알려져 있죠. 그러나 이게 한국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적대적 M&A를 주도하는 세력은 '기업사냥꾼' 혹은 '투기세력'으로 공격당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정부가 저평가된 기업의 대주주 편에 서는 게 비일비재합니다. 이러니 자연스럽게 한국 주식시장은 적정 주가에 거래되기 힘들고, 또 투자자들도 기업의 내재가치 보다는 테마 같은 단기 이슈에 반응하게 됩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1978년 벌어진 건설주 파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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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식시장을 육성함으로써 기업의 자금조달을 원활히 하고자 한 정부의 정책은 부작용을 낳을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업의 상장을 촉진하는 데에만 신경썼을 뿐, 부실기업의 상장이 대거 이뤄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건설주 파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341쪽).
우리 증권시장 사상 단일종목으로 가장 큰 폭등을 보였던 것은 1975년부터 1978년 상반기까지의 건설주였다. 1975년 1월 개장일에 7.65로 시작한 건설업종 지수는 1978년 6월 24일 409.91로 최고치에 이르기까지 무려 50배 이상 상승하였다. 이러한 건설주의 폭등은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중동국가에서 건설공사 발주가 늘어나고, 여기에 우리 나라 건설업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대규모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건설업이 급성장하였기 때문이었다.
버블이 발생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흥미로운 책 "버블:부의 대전환”는 아래 <그림>과 같이 버블의 3요소를 지적합니다. 첫 번째는 거래의 용이성(=상장 주식 증가), 두 번째는 유동성의 증가, 세 번째는 미래에 대한 낙관에서 시작된 투기 붐이라고 합니다. 1970년대 후반의 건설주 투기도 이 요소가 고루 작용했죠. '사채 동결' 조치 이후의 저금리 여건, 중동 건설 붐, 그리고 상장기업의 증가에 따른 다양한 투자 대상 등장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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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었습니다(342쪽)
우리 나라 건설업의 해외진출은 국가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해외건설 진출이 규모면에서 크게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삼환기업이 1973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속도로 공사를 수주하면서 시작된 중동건설이 본격화되는 1975년부터였다. 정부는 1975년 말「對중동진출 추진방안」을 수립하고 해외건설사업소득 및 근로소득에 대해 조세를 감면하는 등 중동건설시장 진출을 촉진하였으며, 국내건설업체들도 적극적으로 해외건설 수주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해외건설 첫 진출인 1973년에는 1억 7,400만 달러에 불과했던 수주액이 1978년에는 81억 4,500만 달러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이 해외건설 수주액의 97%인 78억 9,200만 달러가 중동시장에서의 건설수주액이었다.
물론 유동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었습니다(342~343쪽).
중동에서의 건설수주액이 급증함에 따라 유입된 엄청난 오일달러는 통화공급의 증가와 이에 따른 유동성 과잉을 야기하였다. 게다가 제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착수에 따른 투자확대 및 수출경기의 호조는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1977년 통화증가율 목표선은 23~25%였으나, 해외부문에서의 과잉통화공급으로 연말에는 통화증가율은 40.7%에 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플레이션 위험을 분산시키기 위한 헤지수단으로서의 증권투자에 대한 선호경향이 나타나 부동자금이 대거 증권시장으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1977년 들어 증권시장은 전에 없던 큰 활황세를 맞이하였으며,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증권시장에는 전형적인 투기장세의 조건이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1975년 이후 주가는 연평균 100%를 상회하는 상승세를 보였으며, 1977년 초 종합주가지수 96.39로 출발한 증권시장은 연말에 이르러 종합주가지수가 136.96을 기록함으로써 연간 42.1%의 상승을 보였다. 주도주는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건설주였다. 1977년 (중략) 211.4%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거래실적 또한 전체 거래대금의 20.4%를 차지하며 연중 내내 주도주로서 모든 투자자들의 각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국증시의 흥미로운 '고점' 신호가 나타납니다. 바로 건설업이 아닌 기업들 조차 자신이 건설업인양 포장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입니다(344쪽).
건설주 대부분이 동시호가부터 상한가 일색이었고, 따라서 상한가로주문을 내어도 겨우 몇 주만 배정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정관의 사업목적에 관한 조항에 건설업이라는 문구만 삽입해도 건설관련주로 취급받아 상한가를 기록했다. 약 300년 전 영국에서 무역이 수익성 높은 사업으로 인식되어 무역을 한다는 말만 내걸어도 그 회사의 주가가 폭등하던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어떤 투자자는 건설주가 오르는데 ‘건설화학’은 왜 오르지 않느냐고 항의성 문의를 했다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었다. 1977년 3월 초에 건설업종 주가가 연초 대비 41포인트나 오르는 과열상을 보이자 증권업협회는 과다하게 치솟는 건설업종 주식의 매수주문에 대해서는 업계가 자율규제한다고 결의까지 할 정도였다.
시중의 과잉유동성으로 빚어진 증시의 열기가 발행시장에서는 청약과 열현상으로 나타났다. 최고의 인기주는 역시 건설업종주였다. 1977년에 공모비율이 최고 250:1에 이른 것도 있었으며, 건설업종에 대한 공모비율은 평균 101.9 : 1로 전체 평균 34.6:1을 훨씬 상회하였다. 투자자들은 안정성이나 수익성을 따지기보다 건설업처럼 성장성이 높은 기업, 인기업종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다. 마침내 당국은 1978년 1월에 청약과열을 억제하고 투기를 막기 위해 공모주 청약예금자에 대한 배정비율을 상향조정하고, 청약예금의 예치기간을 단축함으로써 부동자금을 저축성 예금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며, 주식공개 인수업무 유치경쟁에 따른 폐해를 피하기 위해 일정 기준에 따라 주간사를 지정하는 '주간사 풀제’를 채택하였다.
최근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중이죠. ㅠ.ㅠ
NFT 나왔다 하면 상승… 엔씨 ‘상한가’ [3분 국내주식]-국민일보 (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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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주식시장의 여름은 이제 끝나고 가을로 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건설주 열풍 속에서 부실 건설사들이 마구잡이로 상장하는 등 주식 공급 물량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343쪽).
그런데 주식발행시장의 이러한 활황세를 이용하여 소형 주택업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대형 회사로 탈바꿈하였다. 증권시장이 호황을 보이면서 기업은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일부 기업의 경우에는 자본금이 1년에 수 배씩 확대되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상장한 正進建設이라는 회사는 자본금이 1978년 초에 11억 원에 불과했지만, 상반기에 유상증자를 통해 20억 원이 되더니 하반기에 또 다시 100% 유상증자로 40억 원이 되었다.
1977년 말 현재 자본금이 4억 2,000만 원이던 汎華建設은 1978년 5월의 기업공개를 앞두고 세 차례에 걸친 유상증자를 통하여 자본금을 2배 이상으로 늘렸으며, 공개 후에는 우선주 6억 4,000만 원어치를 공모하여 자본금을 16억 원으로 늘렸다.
위 사례의 정진건설은 1979년 3월 부도가 났고, 범화건설은 상장 6개월 만인 1978년 12월에 부도가 났죠. 이 결과 1979년에는 몇 되지 않는 상장 기업 중에 무려 7개가 부도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정부의 긴축정책이 취해지면서 1978년 건설주 열풍이 붕괴됩니다. 마지막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기업들이 상장되었기에 건설주 버블이 붕괴되었는지는 아래의 <표 7-2>에 잘 나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