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부동산 패러다임의 기원
기하학의 탄생
고대 이집트인은 홍수로 나일강이 범람한 후에 토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기 위하여 토지를 측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때 발전하기 시작한 토지 측량의 기술을 기하학의 기원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이집트인의 수학적 지식이 집약되어있는 아메스의 파피루스에는 다양한 도형의 넓이와 입체의 부피를 구하는 방법이 적혀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기하학을 이용하여 이집트인은 '영혼의 묘'인 피라미드를 건설할 수 있었지만 지어진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이러한 측정의 원리를 이해하여 보편적이고 간단한 법칙으로 발전시킨 것은 그리스인이었습니다. 이집트인이 개발한 토지 측량의 기술은 지중해를 건너 그리스로 전파되었는데 실용적이었던 이집트인과는 달리 그리스인은 여기에 철학적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들은 도형에 대한 개념을 새로이 정리하고 연역적으로 논했습니다. '연역'이란 먼저 가설을 세우고 실제 사례로 검증하여 규칙을 확정하는 것이고, '귀납'이란 실제 사례들로부터 관찰되는 공통점들을 규칙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특히 탈레스(Thales)와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연역적 논증을 기하학이라는 학문의 영역으로 발전시켜갔습니다.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탈레스는 그리스의 작은 도시 밀레투스에서 태어나 천문학, 수학,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이집트와 바빌로니아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밀레투스로 다시 돌아온 탈레스는 학교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과학, 천문학, 수학, 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태양과 달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과거에 일식이 일어났던 기록들을 자세히 조사하여 일식이 규칙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585년 5월 28일에 일식이 일어난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러한 탈레스의 명성이 이집트에도 알려지면서 이집트 왕이 피라미드의 높이를 구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피라미드의 높이를 구했습니다. 우선 그는 막대기 하나와 길이를 재는 줄자를 준비하여 한낮에 막대기를 피라미드 앞의 땅에 꽂았습니다. 이때 피라미드의 그림자 끝과 막대기의 그림자 끝이 일치하도록 막대기를 꽂아 피라미드의 그림자가 피라미드 밑면의 한 변을 밑변으로 하는 이등변삼각형을 이루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피라미드의 그림자 길이, 막대기의 그림자 길이, 막대기 길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하고 닮음의 비례식을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구할 수 있었는데 이 원리를 닮음비(Ratio of Similitude)라고 부릅니다.
한편, 피타고라스는 에게해 사모스섬에서 태어나 탈레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스승인 탈레스의 주선으로 이집트로 떠나 23년간 유학했고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이집트가 함락되자 바빌론에 포로로 이송되어 12년을 보냈습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접한 피타고라스는 56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남이탈리아의 크로톤섬에서 철학 공동체를 결성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수가 만물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수를 기하학에서의 '점'에 대응시켰습니다. 이를테면, 자연수(natural number) 계열의 합은 삼각형 수에, 기수(cardinal number) 계열의 합은 정사각형 수에 대응시키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의 정리(Pythagorean Theorem)는 피타고라스의 가장 큰 수학적 성취라고 할 수 있는데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의 길이를 제곱한 값이 다른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더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사상을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그 자신의 업적인지 제자들의 업적인지는 불분명하며 그의 증명법도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자인 필로라오스와 기타 학자들의 저술에 당시 피타고라스와 그 일파의 업적이 알려져 있는 정도입니다. 오늘날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증명법은 매우 다양한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유클리드의 방법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
유클리드는 원론(Elements)이라는 저작을 통해 고대 그리스 기하학을 정점에 올려놓은 인물입니다. 유클리드의 생애에 대하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아마도 플라톤의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초청에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온 학자가 아닌가 추정됩니다. 그는 광학, 음악, 천문학 등에 관한 10가지 정도의 책을 썼는데 그 중 5가지는 아랍어로 번역된 것이 일부 남아있습니다. 그가 저술한 '원론'은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거의 모든 수학적 지식을 깊이 연구하여 하나의 이론 체계로 조직한 13권 분량의 방대한 저작입니다.
유클리드는 원론에서 기하학의 논리 전개에 필요한 다섯 개의 공준(postulate)과 도형의 크기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다섯 개의 공리(axiom)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기하학에서 사용할 용어를 명확하게 정의하여 도형의 일반적인 성질들을 증명해갔습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공간에 대한 수학적 성취 외에 그가 수학을 소개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연역적(deductive) 추론으로도 유명합니다. 앞서 연역에 대해 언급한 바에 비추어 보면, 연역적 추론이란 사실이 아닌 명제들의 인과관계에 따라 결론을 도출해가는 논리적 추론의 방법을 말하는데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하학과 부동산
근대의 급격한 산업화가 만들어낸 현상들 중 하나가 도시화와 도시의 고밀화입니다. 산업혁명의 출발점이었던 증기기관차는 모든 지역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산업 생산의 성과물들이 닿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물들은 철도역 인근에 멈추어 인근 지역에 배분되었습니다. 즉 철도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산업의 성과물들이 거래되는 시장이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시장들은 자연스럽게 많은 이들을 끌어 모았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대규모의 공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수요에 비해 새로운 교통 수단의 혜택이 닿는 도시의 땅은 공급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공간을 사용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마침 건물을 수직적으로 키워 밀도를 높일 수 있는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도시의 건물들은 점점 높은 밀도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확보한 부피 안에서 최대한의 면적을 찾아내기 위한 기하학 퍼즐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오늘날에도 제한된 대지 안에서 확보해낼 수 있는 공간의 규모, 즉 밀도는 그 대지의 가치를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들 중 하나입니다. 오늘날의 도시들에 나타나는 밀도는 과거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높아졌고 부동산의 가치 또한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와 달리 교통 수단에 대한 접근성 외에도 많은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 퍼즐을 풀기 위해 경쟁하는 부동산의 속성은 과거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