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을 하다 문득 눈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뻑뻑함 탓에 눈을 깜빡이는 것이 신경 쓰였고, 이물감과 압력이 느껴져 자주 비볐다. 손을 많이 대는 만큼 붓고 충혈되는 일도 잦았다. 모니터나 책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작열감 비슷한 화끈함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 인공눈물을 뜯어서 한 방울씩 떨어뜨려 넣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필 그 직전 과도한 스트레스로 오락가락하던 청력이 정상으로 돌아오던 차에, 귀가 나으려니 눈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꽤나 불안했다. 몇 년에 한 번 있는 가장 바쁘고 긴장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랬다.
몇 달을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지도 어플을 켜 가까운 안과를 찾았다. 다행히 길 하나만 건너면 있는 오래된 빌딩에 안과가 한 곳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른 이들이 식사를 하러 몰려 나갈 때, 나는 괜히 병원에서 기다리다가 시간을 쓰는 것이 아까워, 다른 환자가 몰려들기 전에 도착하려 걸음을 재촉했다. 낡은 빌딩에서는 낡은 걸레로 바닥을 닦으면 생기는 물비린내가 났다. 2층에 있던 병원은 낡은 빌딩만큼이나 오래돼 보였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병원에는 다른 환자가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오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하며 문을 열었다.
비어있는 접수대 앞에서 접수를 하려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대기실에서 TV로 바둑을 보던 반백의 어르신이 말을 건넸다. “진료 보러 오셨어요?” 나는 그가 진료를 대기하던 다른 환자일 거라 생각하며, 건성으로 ‘네네’ 대답했다. 고개를 돌려 눈으로 간호사를 찾는데, ‘영차’ 소리를 내며 소파에서 일어난 그가 옆에 걸쳐 두었던 흰 가운을 입고는 진료실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선입견 탓에 무례한 행동을 저지른 건가 아차 싶었다. 뻘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으며 진료실로 들어가니, 낡은 빌딩과 오래된 병원만큼이나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진료의자가 놓여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오른손을 펼쳐 내밀며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원래는 갈색이었을 등받이 가죽이 허옇게 벗겨진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의사 선생님의 체구는 작았다. 서 있을 때도 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작았다. 나는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긴, 그래서 선키에 비해 앉은키가 상당히 큰 체형이다. 그렇기에 그가 자신의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내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내 눈을 보여주기 위해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말하지 않아도 잘한다’는 듯 입을 삐죽이며 옅은 미소를 짓고는 손을 뻗어 내 눈가를 짚었다. 그는 내 눈을 크게 벌리기도 하고, 양쪽 눈을 번갈아 가리기도 하며 몇 가지 기구로 찬찬히 살폈다. 눈에 작은 플래시로 빛을 비춘 뒤, 그가 말했다. “일을 많이 하시나 봐?” 그의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실리지 않았지만, 나른하거나 건성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부담이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말씨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뭐. 근데 요즘은 다들 그렇게 살죠.”
안압을 재는 기구로 바람을 불어넣으며 그는 말을 이어갔다. “염증이 많이 있네. 안압도 살짝 높고.” 평소에도 병원에 갈 때면 과한 진료를 하게 될까(그보다 과한 진료비를 부담하게 될까) 걱정하던 나는 약간의 불안을 느꼈다.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에 대한 걱정과, 큰 문제가 있을 때 들어갈 계산치 못한 금전적 지출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사실 큰 차이가 없다. 나는 살짝 망설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많이 안 좋은 건가요?” 그는 고개를 숙여 차트에 무언가를 적으며 답했다. “달리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래.
안과에서 갑자기 달리기라니.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당황해서 물었다. “네? 저 운동 잘 안 하는데. 다리가 아프면 눈이 아프나요?” 의사 선생님은 책상에서 눈을 떼며 나를 보더니 또다시 입 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게 아니라, 달리기를 막 하다 보면 정강이가 당겨서 더 못 뛰어. 그리고 그게 지금 당신 상태야. 근데 또 잠깐, 한 5분만 멈춰서 쉬면 안 아파지거든? 그럴 때 다시 뛰어야 하는데, 쉬지도 않고 뛰어 댕기면 정강이가 버티나.” 잠시 뜸을 들인 그는 말을 이어갔다. “눈도 마찬가지야. 한 번씩 하늘도 보고, 충분히 감아 주기도 해야지.”
막연하게 ‘쉬고 싶다’ 거나 ‘여행 가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시기였다. 치열한 내부 경쟁에 눈치도 많이 보였고, 주변 사람들 모두 그렇게 쉼 없이 달리니 내가 먼저 쉬겠다는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휴일도 없이 몇 달을 매달리던 중이었고, 스스로도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게 그렇게 되나요.”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매우 정확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혀끝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젊을 때 쉬는 법도 배워둬요. 그래야 나중에 정말 필요할 때 선택할 수 있으니까.” 의사 선생님은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들어 간호사를 불렀다. 환자가 들어간 것을 몰랐던지 뒤늦게 들어온 간호사에게 의사 선생님은 차트를 건넸고, 나는 그런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에서 나왔다.
진료를 받는 그 잠깐 사이에 대기실에는 환자가 여럿 도착해 있었다. 내가 나온 진료실로 들어간 것은 젊은 아이엄마와 초등학생 정도 된 여자아이였다. 처방전을 받고 결제를 하며 진료실을 살짝 들여다보니, 속세를 초월한 도사 같은 풍모를 보이던 그 의사 선생님이 “에고. 여기가 아팠져요?”라며 혀 짧은 소리를 내고는 크게 웃고 있었다. 상대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정말 내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있는 신선을 만났던 건가 싶었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물론, 살짝 비싼 진료비 영수증을 받아 들며 금세 현실로 돌아왔지만.
그때 정신없이 매달리던 일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1년 가까이 시간과 돈을 쏟았지만 남은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경험뿐이었다. 당연히 내심 기대했던 대가도 전혀 받지 못했다. 갑자기 생긴 여유가 당황스러웠다. 예기치 못한 공백은 허무했다. 입에 달고 살던 여행은 막상 시간이 생겨도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지쳤고, 그만큼 너무 많은 것을 쏟아낸 탓에 일종의 번 아웃 상태가 되어버렸다. 소진된 나는 관리하지 못한 몸 이곳저곳에 지방과 군살이 붙어 무거워졌고, 눈은 여전히 뻑뻑했다.
항상 부족하다 생각했던 시간이 이제는 남아돌았다. 매일 모니터 앞과 현장을 오가며 정신없이 달리다가 성과나 결과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며칠 동안은 멍하니 앉아 있는 내가 낯설기도 했다. 몰두할 일이 없으니 게을러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남는 게 시간뿐이니 집에서 뒹굴 거리다 아무 때나 잤다. 밥을 먹고 잤고, 넷플릭스를 보다 잤고, 술을 마시다가 양치도 하지 않은 채 잤다. 끼니를 거르고 말 그대로 24시간, 하루 종일 잠을 잔적도 있다. 해가 떠도 일어나지 않아도 됐고, 해가 져야만 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일주일쯤 자다 깨는 일을 반복하다 문득 깨달았다. 더 이상 안약을 넣지 않아도 눈이 아프지 않았다. 아주 많은 것을 잃었다 생각했는데, 그렇게 다 내려놓고 하염없이 쉬었더니 건강이 조금이나마 돌아온 것이다. 컴퓨터 앞에 매일 앉아있느라 거북이처럼 굽어버린 목과 어깨도 살짝 펴졌고, 항상 결리던 어깨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때 그 안과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일단 쉬니까 뭐라도 해결되기는 했다. 좋기도 했지만, 동시에 슬프기도 했다. 이 일주일의 여유를 갖지 못해 힘들어하던 내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났다. 나는 다시 일자리를 구해 열심히 살고 있다. 일하는 거보다 잠을 자는 게 훨씬 좋지만, 일확천금 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다. 자연스레 어깨는 다시 뭉쳤고, 며칠 연달아 과로하는 날이면 전처럼 눈도 아프다. '이럴 때는 자야 낫는데'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회인이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나. 뻑뻑한 눈에 안약을 떨어뜨려 넣으며, 지금 모습을 그때의 안과 의사 선생님께 이야기하면 뭐라 답할까 생각해 보았다. 상상 속에서 그는 단단한 무쇠도 찬 물과 뜨거운 불을 오가며 단단해지는 거라고 내게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상상은 자유다.
글을 마무리하며, 그때의 병원이 여전히 잘 있는지 궁금해 검색을 해보았다. 아직 영업을 하는지 최근까지도 병원 리뷰가 달려있는 것을 보며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호평 일색인 글들 사이로, 어느 환자의 후기가 눈에 들어왔다. ‘열심히 보지도 않는 거 같던데, 농담조로 우스갯소리 하고 반말하는 게 친절이 아닙니다.’
아이코. 내겐 감동으로 남았던 의사 선생님의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불친절로 남았다.
역시 사람이 제일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