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지직) 이재한 형사님 들리십니까?”
김은희 작가가 쓴《시그널》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과거에서 걸려온 무전으로 현재와 과거의 형사들이 연결되어 미제 사건들을 수사하는 장르물인데 종영한 지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호평을 받는 작품이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한 연결고리는 무전기다. 실제로 주파수가 맞으면 무전기끼리 연결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나 미래는 힘들겠지만. 반대로 말하면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영원히 연결되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감정에도 주파수가 있다. 슬픔, 화남, 두려움, 불안함… 이러한 감정이 나를 지배할 때 절대 하지 않는 행동은 시끌벅적한 곳에 가는 일이다. 기분 주파수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는데, 밝고 신나는 곳에 가면 겉으로는 즐거워 보이지만, 진짜 나의 감정은 더 깊고 낮은 곳에 숨어버린다. 결론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해소되지 않는 것이다.
십일 년 전쯤이었나. 인도를 여행할 때였는데, 인도인 지인의 추천으로 명상 센터에 갔다가 난생처음 명상이라는 것을 경험하였다. 센터의 명상 방식은 이렇다. 십 일간 묵언의 상태로 새벽 네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명상에 집중한다. 일과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밥 먹기, 명상하기, 지도 선생님 말씀 듣기가 있다. 나는 힌디어와 영어에 능통하지 않았기에 센터의 배려로 카세트테이프의 한국어 안내를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과가 추가되었다. 가끔 지도 선생님이 들어와서 영어로 부연 설명을 해 주기도 했다.
센터에 들어가기 전, 지인이 여러 명이 한방을 쓰기 때문에 말을 안 하기가 매우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독실. 그것도 화장실까지 딸린 제법 괜찮은 방을 배정받아서 다른 사람들과 부딪힐 일이 전혀 없었고, 말하지 않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이틀간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집에 가고 싶을 정도였다. 명상 홀에 들어가면 원하는 자세를 취하고 그 자세에서 가능한 한 움직이지 않고 명상을 하는데, 아무리 편한 자세라도 삼십 분만 지나면 다리에 저리고, 엉덩이가 아파졌다. 긴 시간 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도 선생님은 자극적인 감정이나 느낌에 치우치지 않고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든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라고 했다.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에 빠졌을 때 사실을 확대 해석하기도 하고,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에 빠졌을 때는 자신도 모르게 사실을 더욱 미화하거나 나르시시즘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명상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객관화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하던 말씀이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가물가물하지만) 기억난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제대로 해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지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좌식 방법에 투영했다.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 눈을 감고 호흡하며 의식 속에서 내뱉은 숨을 따라가 아픈 곳을 호흡으로 매만지고 바라보려 노력했다. 나흘이 지나자 더는 앉는 자세가 힘들지 않았고 마침내 오롯이 명상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리에 통증이 오면 다른 자세로 바꾸면 그만인 것을,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마 다리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으리라. 지루하고 짜증 나고 집에 가고 싶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자신에 대한 원망을 다리에 돌린 것이다.
명상해서 좋은 점은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도, 힘들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감정의 초반에는 슬프고 화날 수 있다. 그때 왜 화가 났는지, 왜 슬픈지 눈을 감고 호흡하면서 파고들어 보면 그 원인이 보인다. 생각보다 별것 아니고 생각보다 작기도 하다. 그러면 다음은 해결책을 구상하면 된다.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십 일간의 명상 체험을 마치고 일 년 동안은 엄청난 명상 예찬자가 되어 매일 저녁 오 분 동안 명상하기를 실천했다. 그러나 지금은 관둔 지 오래되었다. 왜냐하면 강력한 단점도 있어서다. 좋은 일이 있어도 동시에 이것 또한 사라질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기쁨이 크지 않았다. 어느 날(그날은 나에게 좋은 일이 있었던 날이었는데) 좋은 소식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바로 다음에 생길 법한 문제들을 다이어리에 쓰면서 대비책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아니, 뭐 하는 거야, 잘했으면 기뻐하는 게 당연하지’라는 마음이 들었고 그 뒤로 매일 하던 명상을 그만뒀다. 나는 타고난 나르시시스트라서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각할 때 극강의 행복을 느끼는데, 명상 센터의 가르침대로라면 긍정적인 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했기에 행복감이 반감되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는 데에는 명상만 한 것이 없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중압감으로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는 눈을 감고 호흡의 세계로 빠진다. 오 분에서 십 분 후 눈을 뜨면 단단해진 자신을 느낀다. 중압감은 결국 내가 만들어낸 부정적인 감정일 뿐, 해결할 필요조차 없다. 받아들이면 되고 안아주면 된다.
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명상 대신 잠을 청한다. 이틀 정도 침대에서 빠져나오지 않는다. 잠의 세계로 침전하여 명상하듯(?) 잠을 잔다. 잠이 오지 않으면 잠이 올 때까지 멍하니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도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잠을 자고 또 자고 일어나서 샤워하면 기분이 개운하고 산뜻해진다. 마음은 후련해진다. 이때, 이불과 입던 옷을 싹 다 세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을 푸는 데 필요한 것은 딱 맞는 주파수다.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방법이어도 마음이 풀어지지 않는다. 슬픔과 어두운 마음이 침전되어 있는 깊은 곳에 주파수를 맞춘 후에야 비로소 다독일 수 있다. 그게 나에게는 명상과 잠이다.
(치지직) 슬픔아 들리니?
사람마다 감정의 주파수는 다르다. 자신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지면 다음은 주변 사람들의 감정은 어디 즈음에 있는지 관찰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의 주파수에 맞추어 보듬어 주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