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나를 본다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면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주는 거대한 에너지로 존재하며, 같은 파동의 상황과 사람들을 끌어들여 삶이 만들어진다. 삶에서 만나는 모든 상황과 사건들은 나를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어른들도 누구나 처음엔 아이였단다. 그걸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걸 잊지 않는 게 중요해 영화 〈어린 왕자〉 대사 중
Stephen Andrews 님의 사진, 출처: Pexels
막상 엄마가 되고 보니, 아기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를 낳기 전 10년 동안 반려견 깜이와 함께 생활했는데, 아이가 많이 어렸을 때는 깜이와 아기를 혼동하기도 했다. 가령 깜이는 집 안에서 내가 어디에 있든 냄새만으로 나를 금방 알아차리고 찾아냈다.
하물며 외출했다 돌아오면 현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내가 오는 것을 알고 기다렸다. 당연히 아기는 아무리 “엄마 여기 있어!! 아가야, 엄마 여기 있어. 지금 우유 타가지고 갈게~ 기다려~ 응? 아가야 기다려~ 엄마 여기 있네~!”라고 말해도 그 말을 들은 건지 못 들은 건지, 1분 1초도 기다려 주지 않고 울어댔다.
가끔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을 때나, 주방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 때, 잠에서 깨어나는 아기의 뒤척임이 들려올 때, ‘당연히 여기에 있는 줄 알 거야.’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가 아기가 앙앙 울어대는 소리에 인지 되곤 했다. 그 둘은 무척 사랑하고 귀여워하는 존재였다. “울 아가, 애기, 내 새끼, 귀염둥이” 등으로 호칭도 비슷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깜이와 함께 생활해 왔기 때문에 ‘아기가 깜이처럼 나의 움직임을 바로 알아차려 볼일을 볼 때 기다려 주었으면’하고 바라는 철부지 엄마였다.
갑자기 엄마가 된 나는, 나를 그대로 닮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아기’를 잘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이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어떤 것인지도 잘 몰랐다. 아기가 좀 어릴 때는 힘이 닿는 데까지 안아 주고, 먹여주고, 눈을 마주하고, 함께 웃고, 재워주며 정성껏 돌보는 것이라고 느꼈지만,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느끼게 될, 특히 아빠 없는 공백을 어떻게 매울 수 있을지를 늘 고심해야 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엄마에게 바랐던 것은 큰 것이 아니었다. 세심하게 준비물을 챙겨 주고, 정성껏 맛있는 도시락을 싸주고, 갖고 싶었던 인형을 선물 해주고, 생일이면 근사한 케이크로 파티를 해주고, 소풍이나 운동회 때 용돈도 듬뿍 주고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우리 집은 정말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어릴 때 엄마가 돈을 꺼내놓고 여기저기 주고 나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몇 시간씩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빚쟁이들과 맞닥뜨린 엄마가 사정을 하는 모습도, 우리끼리만 있던 낮에 신발을 신고 집안으로 들어와 그냥 줘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은 허름한 세간살이에 빨간 딱지를 붙이는 아저씨들도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없다는 것쯤은 스스로 알고 있었다. 엄마는 늘 화가 나 있었지만, 어떤 날은 슬퍼 보였고, 어떤 날은 우리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겨운 얼굴이었다. 드문 일이었지만, 우리 가족이 외식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신났지만 그런 날에도 엄마는 잘 웃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에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진짜 엄마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가난하다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었을까?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가 부자가 된다거나 하는 일 따위는 당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의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다면 무엇일까?
엄마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미안해. 혜진아”
“준비물 못 사줘서 미안해, 오늘 학교 가서 힘들 텐데… 다음엔 엄마가 꼭 챙겨 줄게”
“생일 축하해 혜진아, 엄마가 케이크 못 사줘서 미안해. 마음은 정말 해주고 싶은데, 엄마도 못 해줘서 속상하다. 내 딸아. ”
“엄마는 네가 원하는 다 해주고 싶어. 너는 가질 자격이 있으니까”
“엄마가 졸업식에 가고 싶었는데 못가서 미안해. 졸업 진심으로 축하해”
“사랑해 우리 딸 ”
아쉽게도 이런 말들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인간이라서 가질 수밖에 없는 많은 욕구를 무시당한다고 느꼈다. 가난이 상처 입힌 것이 아니었다. ‘무엇도 가질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존재 자체의 무시가 상처 입혔다. 나도 먹고 싶은 것을 먹을 수 있고, 가질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당장 원하는 것을 해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원하는 아이에게 “미안해”라고 말했다면, “너도 그걸 먹을 자격이 되지만, 내가 지금은 돈이 없어서 못 해준 거야. 미안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현실을 단지 하나의 사실,‘가난’한 것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이라는 것은 불편하고, 먹고 싶은 것을 보면 몹시 먹고 싶어서 입에서 침이 뚝뚝 떨어질 수 있지만, 가난 이라는 이름 뒤에 ‘불행, 수치, 실패, 무기력, 좌절’ 등을 끌어다가 붙이며 나 자신을 어둠으로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되면 알 것 같았던 것들이 엄마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알아 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른이라는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좋은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엄마가 되었다고 해서 좋은 엄마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 구박했다는 이유로 엄마를 평생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모든 불행을 엄마의 탓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훨씬 편할지도 몰랐다. 좋은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달라져야 한다는 것, 곧 그동안 경험하고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우고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려견을 사랑하는 방식대로 세상에 홀로 오롯이 서야 하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성장시킬 수는 없었다. 상황이 어떻든 아이를 잘 키워야 했다. 상황을 변화시킬 힘이 없었다.
내 안에는 상처받은 아이가 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쿨 한 척, 성격 좋은 척, 대인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내 안의 분노는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적으로 올라와 나를 삼켜버렸다. 회사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직장상사였고, 집에서는 엄마였고, 짧은 결혼 생활에선 남편이었다. 나를 닮은 또 하나의 존재, ‘하늘이’와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진실로 그런 나를 마주하는 것이기도 했다.
엄마로서의 삶이 펼쳐지지 않았다면, 영영 내 안에 많은 결핍을 꺼내어 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태어나 몇 개월 만에 아빠와 떨어져 아빠라는 존재가 그리워 우는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다섯 살에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빠를 만나고,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아이는 작은 몸 안 폐부에서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그 작고 시린 가슴을 안고 함께 울며 나를 볼 수 있었다.
유난히 눈물이 많아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의 모습에서도 나를 보았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다가 결국은 할머니에게 이끌려 서러운 발걸음을 돌리는 아이를 보며 나를 보았다. 좀 더 잘살아 보겠다고 도전과 실패를 숱하게 반복해오며 가슴이 시린 새벽 혼자 눈물을 삼키며 나를 보고, 내 엄마를 이해했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어깨에 놓인 무게를 실감하며 언제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매일 새벽 묵묵히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나를 보았다.
그렇게 나와 만나며, 어린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을 아이에게 주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등에 아이를 업고 일부러 동네를 걸어 다녔다. 엄마와 떨어져 하루를 통째로 어린이집에서 보낸 어린 딸의 심장이 내 등에서 쉬어가길 바랐다.
아이가 자라나 더는 무거워 등에 업히지 못할 때까지,
“왜 그렇게 조그만 사람이 다 큰아이를 업고 다녀요?”라고 말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역시 등에서 아이의 살아있는 심장을 느끼고, 숨결을 느끼며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