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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진 Dec 08. 2021

<삶> 곰이 부러워

자연은 겨울에 멈춘다. 살아 있는 생물들은 잠시 색채를 잃기도 하고, 굴속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생명은 얼어붙은 대지 위에서 먹잇감을 찾아 지칠 줄 모르는 발걸음을 옮기고, 연약한 생명들은 소멸해 버린다.


겨울이라는 계절은 살아있는 것들의 육체와 정신을 자극하고, 생명체들은 '생존'이라는 절체절명의 기로에 서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

   

나에게도 겨울은, 그런 기간이다. 모든 계절에 예민하지만, 차원이 다르다. 투터운 외투를 입으면 자동적으로 거북목이 튀어나오고, 어깨와 목은 욱신거린다.  몸은 무거운 외투 속에서 구부러지지 않으려고 사투를 벌인다. 12월이면 이미 다른 계절을 보내며 민첩했던 몸놀림과 역마 기운은 사라진 지 오래다.


금요일 저녁, 동생과 맥주 반잔 정도 마시고, 양볼이 발그레져서는 "왜, 직장인은 방학이 없는 건가요?"라는 사회초년생의  푸념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인간도 겨울 한 달쯤, 모든 것을 잠시 그대로 둔 채 멈춘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도 자연의 일부 아니겠어? 그래서 그게 너무나 당연한 리듬인 거야. 그래서 기업들은 여름부터 겨울을 준비하는 거야, 모든 업종에서 겨울의 휴식기를 위해, 미리 더 많은 일을 하는 거야. 본격적으로 11월부턴 미리 오더를 받고,

납품 등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는 거야. 12월 중순은 한 달간 동절기에 들어가고, 유급휴가를 떠나는 거야. 아, 그게 너무 당연한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엔, 동생의 눈초리와는 상관없이 그 말에 현실감이 느껴졌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고, 상태로 긴 겨울을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육체는 초저녁이면 어김없이 맥이 풀린다. 아침, 한낮, 하루의 시간을 통틀어 봐도 업무에 집중해야만 하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는 맑은 상태가 되기 힘들다. 흡사 임신성 호르몬이 몸을 점령해버린 상태처럼 온몸에 무언가를 덮어놓은 듯한 외부와 나 사이에, 껍질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겨울이 시작될 땐   그랬다. 그래서 껍질을 깨기 위해선, 지독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에 대하여 굳이 핑계로 보일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하자면, 몸의 역사를 들먹여야 한다. '건선'이라는 난치성 피부질환이 발병했던 중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우리 집은 버섯을 재배하는 하우스를 개조해 살고 있었다. 그 안의 겨울은 혹독했다. 방안에 연탄보일러가 있어 이불속은 따뜻했지만, 이불속을 제외하고는 외풍이 심했다. 아침이면, 방안에 있는 물이 쨍 소리가 나도록 꽝꽝 얼어 있었다.


피부병의 원인 또한, 그런 환경 적인 부분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본다.  병원에서는 이 질환에 약이 따로 없어 독한 스테로이드제를 처방해주었고, 성장기를 겪고 있는 몸이  과도한 스테로이드제를 버텨내지 못했다. 입술은 다 불어 트고, 밥을 먹으면, 초주검이 되어 잠이 들었다.  중간중간 초저녁부터 자빠져 잔다는  엄마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그 소리조차 자장가로 들릴만큼, 맥을 추릴 수 없었다. 결국은 처지는 몸뚱이와 눈 커플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몸무게가 10킬로 그램이나 늘었다.  종아리와, 허벅지, 엉덩이, 겨드랑이까지 벌건 세로 줄무늬가 생겨났으며 각종 부종의 온상지가 되었다. 그러기를 수년,그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과 마음에 오랜 세월과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전히 겨울만 되면 몸이 그걸 기억해내고, 지독한 무기력이 몸을 점령해 버렸다.


누군가는 그렇게 오래전 일인데, 아직도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건 그냥 '네가 게으른 것이다.'라고 했다. 계절성 감각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하지만,  겨울이 시작됨과 동시에 병든 닭이 되는 육체를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어제까지 말짱하던 화초가 하룻밤만에 오그라들어있는 형상이라고 해야 할까?






겨울이라는 차가운 계절과 함께 무의식이 반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누군가 내게 '게으르다'라고 말했을 때, 올라오는 강한 거부감과 우울도 이시절의 자아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나를 탐구할수록 겨울이라는 계절은 내면의 무언가를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요일 아침, 모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겨울에 일요일 아침부터 샤워를 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샤워를 하고,  파리바게트에 들러 토스트를 사고, 아이와 함께 가까운 서해로 향했다.  올해 들어 3번이나 찾았던 곳이었는데,  프라이빗한 해변에  발리를 연출한 듯한 카페의 풍경이 이색적이었고, 커피도 맛도 인상 깊었다. 겨울의 그곳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가는 동안 우리는 평소처럼 노래를 부르고, 게임을 하고, 평소에 나누지 못한 대화들을 이어갔다.

그 사이, 내게서 느껴지는 감각이 어제까지와는 확연히 달라짐을 느꼈다. 몸을 둘러싸고 있는 답답한 막이 흐물거리며 감각이 또렷해졌다.


와우!!  쾌재를 불렀다.


올 해는 유난히 하늘이와 자주 짤막한 여행을 갔다. 편의점에 들러 핫바도 사 먹고,  사진과 이름에 낚여 호텔인 줄 알고 예약했다가, 방음도 안 되는 오래된 모텔에서 밤새도록 음악을 틀고 잠을 자야만 했다. 하지만, 여행은 그곳이 어디든 그 자체만으로 신선한 에너지를 선사했다. 그러니까, 지독한 무기력에서 구원해 줄 가장 확실한 에너지가 바로 그것이었고, 여행을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의식적인 힘이 발휘되고 있었던 것이다.








해변의 카페에 앉아, 어제 그리다 만 그림을 챙겨 와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뒤편으로 멀리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겨울이 시작되면서, 헤롱헤롱 거리고 있는 자신에게 '게으르다'는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다. 7시도 안돼서 책을 펴놓고 잠이 들어 버렸고,  컴퓨터 책상 앞에서는 5분도 앉아 있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나가서 걷기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꽉 채우고 있었다.  아침 7시가 넘어서 잠자리를 털고 나와 아이를 깨우고,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잠이 들었던 어제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화장을 지우지 않았던 이유 역시, 세수를 하기 위해 한번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생산적인 일을 시작해주길 바랬던 것이다.


"게으른 년,  그렇게 게을러터져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나는 정말 게으른 사람일까.라고 생각해 보았다.

사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에너지가 넘칠 땐 세상 부지런하고, 깔끔해진다.  

물론 그렇지 않을 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중간엔 비슷한 패턴의 적당히 게으르고, 적당히 부지런하다.


주변에 유독 부지런한 지인의 기준으로 볼 때

꾸준한 부지런함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정 대상의 기준이 있음으로써 비교되는 결과일 뿐,

(반대의 입장에서 그들은 너무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들 입장에서도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사실 게으르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 게으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까.


겨울의 차가움이 불러일으켰던 무기력은, 어쩌면 나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결국, 과거의 오래된 무기력과의 싸움에서 늘 이겨냈다. 하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는 자신을 평가하고, 폄하하는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만큼, 강렬하게 나의 육체와 마음에 각인된 그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아이가 맞는 모든 계절은, 아침은, 세상은 목소리가 달라지길 바랬다. 자신을 일으키는 목소리가 비난이나, 책망이 아니라 '활력'이고 삶에 대한 '즐거움'이길  바랬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엔 아이가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 놓고  춤을 추며 아이를 깨웠고, 당장 몸을 일으키지 못하면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여유롭게 세상의 아침을 맞길 바랬다. 그런 작은 노력들 덕분인지, 아이는 세상을 즐기고, 사랑하고, 도전하고, 해결해 나가는 비범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너무도 다행인 건, 이제는 나 역시도 그 무기력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은 무기력을 돌파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이며 싸웠던 눈물겹던 노력들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적어도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우리를 일으키는 것은 질책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배려라는 것을,


이제는 비로소 아이의 아침을 열어 주듯, 기다려주고,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던 시선을 나에게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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