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라이브에 열광할 수 없는 이유

당신의 근황을 압니다.

by 슥슥




일요일 오전 11시 즈음이면 방 안에서 잠시 귀를 기울인다. 누군가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한 사랑의 세레나데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다. 초청받지 않아도 매일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이름은 다름 아닌 (얼굴도 모르는) 옆/집/남/자.




일요일마다 그는 느지막이 일어나 화장실에서 솜씨를 발휘한다. 휴일이라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데이트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알 수는 없어도 거의 매번 샤워를 하며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의외로 선곡은 2000년대 유행곡이다. SG 워너비나 버즈, 엠씨 더 맥스 같은 추억의 감성 발라드가 화장실 에코 사운드로 울려 퍼진다. 마치 코인 노래방 옆을 지나는 기분이다.



'고려대 대학원 남학생.'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정보는 이게 전부다. "이 층에는 주로 어떤 분들이 사나요?"라는 질문에 부동산 중개인이 답한 한마디였다. 위의 세 개의 단어 중 중개사는 ‘고려대’라는 학력에 힘을 주었지만 정작 내 귀에 남은 건 ‘남학생’이었다.

‘이상한 사람은 아니겠지?’, ‘나가다 마주치진 않겠지?’, ‘이 층엔 남자 세입자만 받나?’ 순간 여성 1인 가구이자 초보 자취생으로서 위험을 감지하는 레이더가 민감하게 발동했다.




남자 세입자에 대한 (혼자만의) 우려는 시작에 불과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외지고 으슥한 골목길, 경사가 20 도는 넘어 보이는 언덕까지. 전세 계약을 망설이게 하는 조건은 대충 둘러봐도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그건 바로 1억이 되지 않는 신축 풀옵션이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회사와의 거리도 버스로 30분이 채 되지 않았다. 나의 자금을 최소로 투입하고 정부 지원 대출을 이용한다면 한 달 10만 원 초반대의 거주비가 예상되는 곳.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돈과 거리' 두 가지 장점만 보고 지금의 전셋집을 결정했다. 4월의 어느 날, 계약을 마치고 밝게 쏟아지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며 부동산을 빠져나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거주비를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설레는 마음까지 들었었는데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어두운 골목길, 경사진 언덕보다 내 일상을 흔드는 복병은 따로 있다는 것을.



이제는 층간 소음보다 무서운 게 '벽간 소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복도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린다. '쿵쿵'하고 계단을 오르는 소리, '끼익 쾅'하고 현관문을 거세게 닫는 소리, '딸깍'하고 스위치를 켜는 소리, '줄줄줄' 볼 일을 보는 소리, '쏴아아'하고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까지. 아무래도 옆집 남자가 도착한 것 같다.



이 정도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 걱정과는 다르게 그는 매우 평범한 대학원생이었다. 주말마다 음악을 향유할 줄 아는 꽤나 감성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그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평일에는 언제쯤 집에 오는지, 주말엔 언제쯤 일어나 샤워를 하는지, 화장실에서 어떤 음악을 듣는지, 많이 취했을 땐 어떤 주사가 있는지(그는 변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해댔다), 아래층에는 여자 친구로 추정되는 인물이 살고 있고 아주 가끔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마저도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사는 소리'를 가까이서 듣는 건 뭐랄까, 우스우면서도 약간 서늘했다. 옆집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생목 라이브에 실소가 터져 나오면서도 동시에 '나의 사는 소리'가 그에게 닿을까 우려스러웠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세면대 물을 틀어 놓고, 친구와 속삭이며 통화를 하는 것도 이를 의식한 결과였다. 나름의 노력에도 소리가 새어나가 민원 알람을 받을 때면 조금 서글프기도 했다. 내가 지불한 이 집의 사용료로는 딱 이 정도의 데시벨만 허용하구나 싶었으니까. 일종의 속박의 범위랄까.




그러나 사람은 어디서나 적응하는 동물. 이곳에 거주한 지 2년에 다다르자 내 몸도 ‘차음’과 ‘무시’에 능숙해졌다. 밥을 먹을 땐 저절로 이어폰을 끼고, 글을 쓸 땐 알아서 귀마개를 하고 있으니 제법 환경에 적응한 셈이다. 게다가 주말마다 들려오는 화장실 소음도 친히 ‘노랫가락’이라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벽 너머 청년의 신상 정보는 꾸준히 내게 들려올 테지만 그렇게 쌓인 소리들이 집을 보는 안목으로 이어질 거라 믿으며 이번 주말도 그의 라이브를 잠자코 들어볼 생각이다.





singer-g324f32198_640.jpg Image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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