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 퇴사하겠습니다 (3)
퇴사 앞둔 사람들 중에, 나처럼 회사에 빡쳐서 인수인계고 나발이고 안 만들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그 업계를 뜰 사람에게만 추천한다. 보통 퇴사할 때의 마지막 모습만 기억에 남고, 그 모습이 그 업계에 돌고돌아 다음 회사에도 퍼질 수 있으니 그냥 무난하게 인수인계 하고 나오는 것을 추천한다(그리고 사람은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니 웬만하면 무난하게 나오는 게 좋다).
그렇다면- 남들이 다 말하는 위의 이유 말고(아름다운 뒷모습^^;) 내가 알려주고 싶은 다른 이유들도 있는데….
내가 입사할 당시, 이미 퇴사한 상태의 전임자가 만들어 놓고 간 <인수인계 파일>은 정말이지 완벽에 가까웠다. 파트별로 폴더까지 다 나눠놓고, PDF 파일로 완벽하게 깔끔 정리!
나는 전임자의 인수인계서를 보고, 그후에 퇴사한 사람들 역시 그런 식으로 깔끔하게 인수인계서를 만들어줄거라 생각(기대)했으나... 천만의 말씀!
제대로 된 인수인계서를 만들어놓고 가지 않는 사람들뿐이었다. 구두로만 인계해주는 사람이 최악이었고...
퇴사 의사를 밝히고 한 달이 남았을 때, 나는 최악의 사람들처럼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인수인계서는 총 50페이지가 넘었고... 중요한 메일들까지 다 파일로 다운받아 압축해놨다.
사실 이렇게 인수인계서를 만든 건, 당연히 그들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1. 주관적 이유: 나는 내 후임자에게 ‘직접’ 인수인계해주는 게 나름의 로망이었다.
초반에는 ‘언제 후임자가 들어오지?ㅎㅎ’라는 바보 같은 설렘을 안고 기다리기도 했다^^ 물론 그러고서 퇴사 일주일 남겨두고도 후임자가 들어오지 않자, ‘제발 나 퇴사하고 후임자 들어와라’는 주술을 걸게 되었지만…
어쨌든 이번에 했으니 이제 두번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너무 답답하고 귀찮다. 하지만! 뭐든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으니 한 번쯤은 경험해봐도 좋다(부디 한 번으로 끝나면 좋겠다…). 특히 나 같은 경험주의자에겐- 내가 안 해본 것에 대해 로망/ 궁금증과 호기심이 있어서 남들이 뭐라 하든 무조건 내가 해보고 답을 내리기 때문이다.
2. 객관적 이유(1): 내가 이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했는지 빠짐없이 알 수 있다.
특히나 인수인계서는 남에게 넘겨주려고(후임자 및 팀원) 작성하는 것이니 가독성과 가시성이 좋게 작성한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말이나 표시로 남겨놓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고서 봐도 얼마나 깔끔하고 잘 이해가 되겠는가?
가장 좋은 점은- 이렇게 남기니 추후 이직 시 포트폴리오나 경력기술서를 쓸 때 보기에도 편하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쓰다 보면 내가 계속 똑같은 에피소드만 반복해서 쓰기도 한다. 또는, 내가 이런 일을 했다고…? 싶을 정도로 기억 안나는 것도 있다. 그럴 때 인수인계서 보다 보면 ‘맞아, 이 일도 했지. 이거에 얽힌 에피소드 진짜 많은데…’ 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새로운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다. 돌려막기 그만!
3. 나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다.
내가 일을 잘하는 것과, 남에게 일을 잘 가르쳐주는 것은 천지차이다. 모든 일잘러가 일을 잘 가르쳐준다고 할 수 없는 것을 다들 잘 알지 않는가?
인수인계서를 작성할 때는 ‘이 정도면 다 알아듣겠지’라고 생각했으나 정작 구두로 알려주려 하니 설명을 제대로 못한다거나, 회사 고인물들/나만 아는 언어로 신입(후임자)에게 설명해서 못 알아듣는다거나… 그런 경우가 정말 많다.
참고로 일을 잘해도 그걸 제대로 설명 못하면 결국 <나만 아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이디어 공유가 어렵다는 뜻이다. 회사 다니다 보니 ’말 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정말 뼈저리게 깨닫는다.
비단 보고서 발표 때뿐만이 아니라 회식 자리, 점심 시간, 탕비실 스몰토크 등등 … 말하는 연습은 항상 해야 한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말하기 연습만 하면 역시나 또 도태되기 뻔하니…
이런 특수한 케이스를 활용해서 자신의 약점을 객관화시켜 보자. ‘나는 앞으로 이런 식으로 말해야겠다’를 깨닫는다거나, ‘나 이건 좀 잘 말하는데?’를 깨닫는다거나…
참고로 이 특수한 케이스는,
인생에서 ONLY 퇴사할 때 단 한번뿐이다.
이직을 안하는 사람에겐 인생에서 3번도 안 주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물론 이런 기회 필요없는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니 짜증 대신 <좋은 기회> 라고 여기고 기회를 잘 활용해보자.
퇴사를 코앞에 두고...
내 후임이 구해지질 않아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으나(인수인계 파일만 팀에 뿌리고 나가면 되니)!
안타깝게도 퇴사 3일 전에 후임자가 입사해버렸다.
^_^
나는 결국 퇴사 3일 전부터 하루 온종일 인수인계를 했고, 마지막 날까지도 일하다가 퇴사했다^^
퇴사하고 나서 한소리 듣기 싫어서였고,
혹시나 연락 왔을 때 '나는 이미 다 인수인계 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위의 1번에서 말한 인수인계 로망말고도
신규입사자에게 회사 소개하고 주의할 점 알려주기 등등 이런거 다 로망이었다…;;^^
종합해보니- 나는 아무래도 ‘멋진 선배’가 되고 싶었나 보다. 매번 막내였고 앞으로도 당분간 막내일 테니, 선배가 되고싶을 만도-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