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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걷는다는 것의 힘

살아내는 방식

by 서담


주말이면 특별한 약속이 없을 땐 늘 걷는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목적도, 운동량을 채우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걷는 것 자체가 좋아서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 고맙다.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걷자면 30분이면 충분하다. 빠르고 편하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멀고 굽은 길을 택한다. 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선 숲길, 데크로 이어진 산책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구불구불한 코스. 이 길을 따라가면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다리는 뻐근해지고, 몸에서는 땀이 흐른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이토록 느리고 험한 길이 내겐 더 위안이 된다. 빨리 도착했을 때의 짜릿함보다, 더디게 걸어 도착한 그 시간이 훨씬 오래 마음에 남는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흐를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이 시간을 진짜 살아냈구나."


요즘은 너무 빠르다. 식사도, 관계도, 선택도, 판단도 모든 게 속도를 재촉한다. 마치 조금만 늦어도 뒤처지는 기분이 들게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들은 느리게 와준다. 감정도, 이해도, 나 자신을 아는 일도 그렇다.


숲길을 걷다 보면 그런 것들이 선명해진다. 목적지를 향해 걷지만, 그 과정이 훨씬 풍성하다. 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발아래 푹신한 흙, 바람결에 실려오는 나무 향기. 걷는다는 건 단순히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걸 느낀다.


사람들도 그렇다. 목적만 바라보고 달리는 사람보다는, 함께 걷는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 말없이 나란히 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들이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숲길이다.


더디게 걷는다는 건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삶을 더 깊고 진하게 살아내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것을 성취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나는 오늘도 그 길을 걷는다. 마음이 빠르게 앞서가려 할 때마다, 천천히 걷자고 스스로를 달랜다. 빠르게는 도착할 수 있지만, 천천히 걸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으니까.


결국 인생도 그렇다. 어딘가로 향하긴 하지만, 목적지가 전부는 아니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나무, 햇살, 사람, 그리고 나 자신이 인생의 진짜 내용일지도 모른다.


한 줄 생각 : 급히 달리는 인생보다, 느리게 걷는 오늘이 더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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