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을캐는 광부 Mar 12. 2024

버틸 수 있는 희망

그리움을 담아 봄의 바람에 보낸다

1994년 4월 15일 입대한 지 이제 1주일이 지난다. 봄은 항상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듯하다. 나는 지금 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그리움에 가득한지를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바쁜 요즘 아침 기상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 때까지 정신이 혼미할 정도의 꽉 짜인 훈련일정은 다른 어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와중에 유일한 희망과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10여분의 짧은 시간일지라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모두들 잠이 든 사이 모포를 뒤집어쓰고 빨간색 휠터를 ‘ㄱ자 플래시’에 갈아 끼운다. 서슬 퍼런 구대장의 눈에 띌세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내의 보고픈 마음을 쓴다는 표현보다는 그대로 쏟아낸다는 게 맞는 것 같다. 들키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나의 몸부림이다.


다음 주에는 본격적인 군사 교육을 받기 위해 각 교장을 구보로 행진할 예정이다. 그동안은 기본 훈련이었고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는데... 하루에 전투복, 체육복, 군장복장을 갈아입기를 여러 번, 걷고 또 걷기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뒤돌아서면 배고프고 허기짐은 또 하나의 인내와 고통이다. 훈련 중이라 PX(군대슈퍼) 출입이 금지되어 더욱 먹는 것에 대한 갈증이 큰 것 같다.


기본 화장품마저 없어 우리 모두는 얼굴이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있는데, 누구 하나 눈치만 볼 뿐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투화와 전투복이 맞지 않아 발에 물집이 생겨 쉬이 가라앉지가 않는다. 교육을 받기 위해 교장으로 행군하면서 같은 학교 친구들을 볼 때마다 서로 얘기를 나누지 못하지만 잠깐 스쳐 지나는 사이에 눈빛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잘 받아봤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모두들 힘들고 고통이 커지는 만큼 여자 친구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는 것 같다. 나와 같은 기혼자가 3명 있는데 서로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이 들 때면 여지없이 교관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온다. ‘5분 뒤 중대 사열대로 집합’

 

어떻게 보면 이런 시련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지금쯤 우리 딸도 제법 많이 커 아빠를 알아볼 텐데... 내가 버틸 수 있는 힘이다.

이전 04화 문득 그런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